스스로를 약하고 보호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의 위험함
사람들은 습관이라고 하면, 행동적 습관을 떠올린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스마트폰부터 들여다보는 습관(하는 것 없이 피곤한 삶의 원인),
화장실 갈 때 스마트폰을 들고 들어가서 한참도록 나오지 않는 습관(치질의 원인),
운동하는 습관, 산책하는 습관, 매일 아침 기도하는 습관 등등.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이 반복되는 것을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영적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라.
내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 보이지 않는 뇌의 세계를 의미한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지만, 누워서 스마트폰을 한참 들여가보고 있는 행동은
결국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 더 정확하게는 뇌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운동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산책하는 것도 모두 보이지 않는 뇌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는 행동의 습관만 습관이라고 부르지만, 눈에 보이는 반복적인 행동은
반복적인 뇌활동, 반복적인 마음에 기인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겉으로 드러난 행동적 습관은 사실상 비가시적인 마음의 습관이라고 봐야 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그것을 반복하기에 행동이 따르는 것이지,
마음이 어떤 것을 반복하지 않는데 행동이 따르지는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심리학이 이렇게 심오하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대학에서 철학과는 없어지지만 심리학은 과학으로 변신하여 살아 남았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는 생각의 문제, 마음의 문제, 더 나아가 마음의 습관 문제를 과거에는 철학이 다루었으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심리학이 다루고 있으니, 심리학이 철학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심리학을 정의하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정의해보려 한다.
심리학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행동에 미치는 효과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라고 말이다.
비가시적인 두뇌 활동이 가시적인 판단, 의사결정, 행동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학문이 바로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눈에 보이는 반복적 행동, 반복된 실수, 반복된 판단 착오, 반복된 갈등 등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심리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습관, 즉 관점, 태도, 성격, 문화, 호르몬의 작용, 사회적 지위 등이
눈에 보이는 실수, 판단 착오, 갈등 등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개개인에 대한 파악한다는 것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마음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프로파일러가 하는 일을 보라. 범죄자의 보이지 않는 마음.
범죄좌의 행동 뒤에 감춰진 심리를 알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눈에 보이는 행동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고, 연기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속마음은 속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습관이 공부를 계속 안 하더라도,
시험 기간에는 잠깐 공부하는 척 연기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습관이 누군가에게 친절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켜져 있을 때는 친절할 수 있다.
(많은 정치인들처럼 말이다. 그나마 연기도 못하면 정치 그만해야지.)
인생을 바꾸고 싶은가? 행동부터 바꾸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행동을 바꾸려면 필연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운동 해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을 유지하면서 운동을 할 수는 없고,
의사의 말을 의심하면서 의사의 처방을 따를 수 없듯이
운동을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하고,
의사의 말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관점의 전환, 즉 마음의 습관에 대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행동의 대전환이 일어날 수 없고, 인생이 바뀔 수 없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굉장히 염려가 되는 마음의 습관이 있다.
10명 중 5명의 젊은 사람들(내가 주로 관찰하는 대학생들)에게서 발견되는 마음의 습관이다.
물론 이 수치는 개인적 관찰의 결과이기에 아직 더 검증이 필요하다.
핵심은 생각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마음의 습관이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마음의 습관이다.
나는 상처받기 쉬운 존재, 나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약하고 얇은 유리같은 존재.
나는 회복력이 없기에 혼나는 것, 비난받는 것, 망신당하는 것, 지적받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존재.
정말 걱정되는 마음의 습관이다.
칭찬만 받으면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것도 적당할 때 이야기다.
되지도 않는 칭찬은 회복 탄력성이 낮은 사람들, 반성과 성찰, 개선의 능력이 없는 사람을 만들 뿐이다.
처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당한 지도와 코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칭찬도 적당히, 정당한 지도와 코치도 적당히 존재할 때 인간은 성장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칭찬만 해달라고 졸라대는 모양새다.
그냥 잘했다고 해달라고. 그냥 웰던(Well done)이라고 말해달라고,
그래서 겉으로는(적어도 남들 보는 앞에서는) 웰던이라고 하고,
성적은 진솔하게 C를 주면, 왜 웰던이라고 하고, C를 줬냐고 뭐라 한다.
피드백을 하면, 혼났다고 하고,
지도를 하면, 마음에 큰 상처('마상'이라고 부른다)를 받았다고 하며,
코치를 하면, 우울해지고 멘탈붕괴('멘붕'이라 한다)가 왔다 한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 가지고, 조금만 건드려도 죽어버리는 '개복치'가 자기 자신이라고 정의한다.
마음의 습관이 이런데, 어떻게 성공적이고 건강한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의 습관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의 의견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관계를 끊거나 이야기를 안할 수 밖에 없다.
토론하고, 질문하고, 질문을 받고, 부딪히고, 말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이런 부딪힘에서 상처 받도 것도 무섭고, 상처 주는 것도 무서운 것이다.
발표는 대본 써와서 읽기만 하고, 앞을 쳐다보지 않는다.
대본을 외워오거나, 대략적인 메모를 가지고 이야기하듯 발표하는 대학생은 찾아보기 어렵다.
발표 후에 질의응답이라도 하라고 하면, 어떻게 그런 걸 시킬 수 있냐는 표정이다.
질의응답을 망신당하는 시간, 공격 당하는 시간, 창피당하는 시간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주류가 되면 어떤 사회가 될까?
각자 마음에 맞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과만 더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확증편향과 반향실효과(같은 말이 메아리치듯 울리는 효과)가 증폭되고,
반대쪽 사람들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관용 따위는 없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한쪽이 권력을 잡으면, 다른 쪽은 완전히 무시하고,
다른 쪽이 권력을 잡으면, 기존 세력은 또 완전히 무시하는,
극과 극만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인성 교육이던, 핵심 교양 교육이던 뭐던, 상관없다.
교육의 어느 부분에서는 반드시 이런 마음의 습관을 바꿔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철학자 니체가 했던 말이 마음의 습관이 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나는 약하지 않다. 나는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고, 강한 존재다.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은 인간을 더 강하게 만든다"
이런 내용들이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게 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이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밝다.
우리를(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를(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That which does not kill us makes us stronger).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참고문헌
Haidt, J., & Lukianoff, G. (2018). 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 How good intentions and bad ideas are setting up a generation for failure. Pengui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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