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것들

과거의 잔해에서는 바닐라 향이 난다.

by gloomee

오늘은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지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이른 아침을 먹고 한가로이 소파에 누워 머리를 비비대는 고양이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다 보면 부드러운 털만큼 마음의 표면이 몽글거리는 느낌이 차오른다. 계속되는 손길이 귀찮은지 머리를 부르르 털더니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총총 걸어가 몸단장을 한다. 나른한 볕을 쬐며 누워있는 것도 잠시, 틀어놓은 티비도 핸드폰 속의 영상도 지루해진다. 이에 맞춰 입도 함께 심심해지는 느낌에 몸을 일으켜 요깃거리를 찾아 나선다. 식탁 위의 과자는 버석한 입안을 더욱 까끌하게 만들 것 같아 싫고 냉장실의 재료로 무언가 만들기에는 솟구치는 귀찮음을 이겨낼 방도가 없다. 꽤 오래 고민을 한 탓에 냉장고에서는 이제 그만 문을 닫으라는 경고음이 삐익-하고 울린다. 마음이 급해져 좀 더 빠르게 눈을 굴리다 며칠 전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다. 빙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맛의 아이스크림이다.


한 입, 두 입 꽁꽁 언 아이스크림의 윗부분을 긁어내 입안에 넣자 기분 좋은 차가움과 바닐라향이 숟가락에서 입으로 옮겨온다. 심심한 입을 달래고 있으니 이제는 눈이 심심하다. 매일 보는 디지털 화면은 눈의 심심함은 풀어주지만 장시간 보고 있기에는 감당해야 할 피로감이 부담스럽다. 무얼 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수납장을 가득 채운 앨범들을 떠올렸다. 눈에 띄는 몇 권을 뽑아 식탁에 쌓아두고 그중 하나의 첫 장을 천천히 넘긴다. 바래진 색감에도 불구하고 싱그러운 젊음과 지난 세월의 아름다움이 빼곡히 담겨있다. 이제는 촌스럽게 느껴지는 옷을 입고 더 이상 하지 않는 분칠을 뽀얗게 한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약간의 민망함과 그보다 큰 향수가 눈 속 깊은 곳까지 채워 오른다.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던 친구들과 지금의 내 나이만큼 젊은 엄마.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들과 여전히 곁에 남은 이들이 한 장면에 담겨있는 모습은 허탈하기도 다행이기도 한 모순적인 괴리감을 준다.


묻어둔 기억을 한참이나 헤집고 있다가 문득 방치해 놓은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이제는 거의 형태를 잃고 묽어진 아이스크림을 옆으로 치운 후 앨범 속 우리를 좀 더 오래 바라봤다. 백 장이 넘도록 셔터를 눌러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를 수 있는 현재와는 다른, 셔터를 누른 순간에 새겨진 장면들의 연속이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표정도 아니지만 소중하게 한 장을 찍어낸 누군가의 마음이 보인다. 카메라의 셔터는 사람의 눈과 같은 원리로 작용된다고 한다. 그 사람의 눈에도 사진에 담긴 내 모습이 새겨졌으리라.


나의 지난 세월과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 어쩐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달라졌으며 액체가 되어버린 아이스크림은 더 이상 차갑지 않다. 하지만 나는 서글프지 않다. 이 액체의 본질은 여전히 아이스크림인 것처럼 앨범 속 젊은 내 영혼은 주름진 껍데기 안에 여전히 싱그러운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소란한 추억에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갈 때쯤 마지막 장을 고이 넘겨 회상의 종지부를 찍었다. 미적지근해진 아이스크림을 몇 번 휘젓다 보니, 휘저어진 것은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모든 것에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 얼른 탁자 위를 청소해 본다. 무심코 흘린 몇 방울의 아이스크림과 몇 방울의 눈물을 닦아내며 지난 시간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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