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발목을 심하게 삐었다. 쿠션이 푹신한 러닝화를 신고 아이들 먹을 빵을 사러 가던 길이었다. 심하게 경사진 채 대충 마무리된 인도 상태를 보지 못하고 발을 디뎠다가 그대로 오른쪽 발이 휙 꺾이고 말았다. 바로 일어서지 못하고 5분 정도를 길거리에 앉아 있었다.
절뚝거리며 집에 걸어간 후, 자연스레 나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는 게 맞겠다. 마침 아이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 입학을 앞두고 아무런 보육기관에도 가지 않는 시기여서 맡길 데가 없었던 데다가, 다리 좀 삔 것 가지고 늘 피곤에 절어 장시간 일하는 남편에게 휴가를 내라하기도 과한 것 같았다. 먼 지역에 계신 양가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만큼 심각한 부상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내 몸이 조금 아프거나 불편한 것은 늘 후순위인 게 당연해진 이유가 컸다.
이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갔지만, 종종 다쳤던 오른발을 반복해 접질리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서너 달이 지난 얼마 전, 또 다시 발을 심하게 접질리고 통증이 많이 심해서 결국 큰마음 먹고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초음파도 보더니, 담당 의사는 말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왜 병원에 안 오셨어요?” 발목이 꺾이면서 인대가 심하게 늘어났고, 인대를 붙잡고 있는 복사뼈 끝이 골절되었다고 한다. 그대로 방치하면 계속 인대가 손상되고, 점점 더 걷는 불편함이 커질 것이라 했다.
발은 26개의 뼈와 30개의 관절, 100여 개의 인대와 혈관으로 이뤄져 있어 인체에서 손 다음으로 정교한 기관으로 꼽힌다. 그런데 발목을 살짝 삐는 발목 염좌 증세를 초기에 잘못 대응하면 발목이 계속 꺾이는 ‘만성발목불안정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발목 인대가 늘어난 채로 장기간 방치하면 발목뼈를 충분히 지탱하지 못해 조금만 자세가 틀어져도 계속 접질린다는 것이다. 이 증상을 장기간 방치하면 발목관절염이 생기고, 최악의 경우 보행이 불가능해진다. 딱 내 이야기가 아닌가. 이 얼마나 아찔한 소리인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집계한 2017년도 심사년도 기준 통계를 보면 ‘발목 및 발 부위의 관절 및 인대의 탈구, 염좌 및 긴장’(진료코드 S93)으로 입원 및 통원치료한 환자가 190만5512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 중 성별 및 연령대별 통계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격렬한 운동을 자주 하는 10대 남성의 경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연령대에서는 모두 여성이 발목 질환을 앓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여성의 골다공증 유병률이 높은 사실 등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여성이 신는 ‘하이힐’을 연관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여성 패션잡지 등에서는 하이힐이 여성의 발목 건강의 ‘적’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잊을 만하면 내놓곤 한다.
뒤늦게 내 발목의 역사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나는 육상 선수로 뛸 만큼 건강하고 빠른 다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20대가 된 후 내 다리는 육체 능력보다 심미적으로 기능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발목의 수난사가 시작됐다. 외모를 가꾸면서 하이힐을 신었기 때문이다. 특히 20대 후반 정치부 기자로 국회를 출입할 때는 늘 정장을 입어야 했는데, 1년에 300일(주5일제가 불가능한 노동환경이었다)은 하이힐을 신고 일했다. 물론 누구도 나에게 하이힐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나는 사회가 젊은 여성에게 외모를 꾸밀 것을 요구하는 암묵적인 기대에 부응하고자 자발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자발적)으로 하이힐을 신었다. 그때 약해진 발목이 지금의 망가진 내 복사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초기에 치료를 했더라면 이 상태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왜 병원에 오지 않았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아무도 나에게 아픈 걸 참으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왜 스스로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첫째 아이를 임신한 이후, 나는 하이힐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대신 엄마가 되면서 ‘모성’이라는 새로운 하이힐 위에 올라탄 채 곡예 하듯 내 역할의 무게를 견뎌왔다. 나 자신을 최후순위에 두고 가족을 우선시하는 엄마의 희생을 찬양하는 사회, 그리고 그렇지 않은 엄마를 비난하는 사회. 2018년 들어 ‘미투’로 촉발된 페미니즘의 거센 열풍은 최근 외모에 대한 여성의 강박과 사회적 기대를 거부하는 ‘탈 코르셋’ 운동으로 확장됐다. 여성인 나를 압박한 코르셋은 20대의 하이힐에서 30대의 모성애로 옮겨간 것이다.
체형 보정용 여성 속옷인 ‘코르셋’을 거부하기 시작한 1020 세대 여성들은 긴 생머리나 화장 등으로 외모를 꾸미는 일이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을 자신의 욕망인양 내면화한 결과임을 지적한다.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과연 순수하게 나의 욕망과 만족을 위한 일이었는지 질문하고, 그것은 결국 자신을 옥죄는 사회적 시선에 의해 강요당한 결과였음을 성찰한다.
어쩐지 현재 30대 후반인 나는 탈 코르셋을 외치고 있는 1020 세대 여성들에게 빚을 진 기분이다. 10년 전, 아픈 발을 부여잡고 꾸역꾸역 하이힐을 신고 다녔던 나는 일상 속에서 그 부당함을 자각하지 못했다. 남성 중심적인 질서 속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여성성에 대한 기대와 사회적 성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버텨’내는 데 급급했다. 만약 10년 전에 탈 코르셋 운동이 있었다면, 지금의 1020 세대들은 훨씬 더 안전하고 성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하이힐 위에서 1년 중 300일을 살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에 와서 복사뼈가 골절되고 인대가 파열되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유능하고 유명한, 50대 여기자 선배인 유인경 작가를 만났다. 유 작가에게 모성 신화를 거부하고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균열과 변혁을 꿈꾸는 3040 세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정치하는엄마들 저, 생각의힘)를 선물했다. 나는 공동저자로 이 책의 집필에 참여했고, 비영리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 작가는 본인의 칼럼에서 책을 소개하며 이렇게 적었다.
“신문기자 시절에는 가족법 개정, 남녀고용평등법을 비롯해 여성의 인권을 위한 법과 제도를 널리 알리는 기사를 부지런히 썼지만 정작 나의 인권, 모성 등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19세기 가치관과 정서를 갖고 있는 나를 비롯한 세대들의 딜레마였다.”
이미 3040 시절을 지나온 선배 여성의 입장에서 지금 분투하고 있는 3040 세대를 바라보는 심정은 내가 1020 세대 여성들에게 느끼는 부채감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오히려 선배 세대 여성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100년 전 여성들은 참정권을 위해 싸웠고, 50년 전 여성들은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싸웠으며, 30년 전 여성들은 노동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텼다. 그것은 아마 그 시대 그들이 싸울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니었을까.
지금의 탈 코르셋을 외치는 여성들도, 정치 참여를 외치는 엄마들도, 회사에서 버티면서 ‘명예 남성’이 되었거나 경력을 단절한 중년 여성들도 할 수 있는 모든 싸움 끝에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리라. 더디고 허탈한 변화의 속도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끊임없이 시대를 반복하며 혁명을 꿈꿔왔다. 페미니즘은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 됐고, 덕분에 세상은 다른 질서와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나답게, 한 명의 독립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크고 작은 싸움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이제 내 인생에서 더 이상의 하이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는 모성 신화와 가부장제를 극복하기 위한 모험을 남겨두고 있다. 나를 옥죄는 코르셋을 벗고 한 인간으로서 완결성을 갖춘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이힐에 혹사당한,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의 발목에 건강과 평화가 깃들길 기원한다.
※ 이 글은 팩트체크 전문 미디어 '뉴스톱(www.newstof.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