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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Nov 30. 2018

글쓰기의 기본 단위는 ‘이야기’다

1-3. 자아를 찾아가는 글쓰기

갓 대학생이 되던 때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을 봤다. 감독의 명성만 듣고 선택했던 그 영화는 10대 때 봤던 달달하기만 한 로맨스 영화들과는 달랐다. 관람 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찜찜함이 남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공통된 일화에 대해 각자 다른 기억을 토대로 그려낸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남자의 시각, 여자의 시각으로 각기 풀어간다. 그래서 같은 사건에 대한 묘사가 조금씩 달라진다.


특히 키스에 대한 남녀의 기억은 판이하게 다르다. 여자는 첫 키스 후 울음을 터뜨린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남자가 기억하는 여자는 키스 후 그저 수줍어했다. 남자의 기억 속에서 여자의 울음은 삭제되었지만, 여자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울음은 클라이맥스다. 자신의 순결성을 과시하고 싶어서였는지 몰라도, 여자에게 키스보다 중요한 사건은 눈물이었다.


이처럼 기억은 자신의 바람대로 가감되고 조작된다. 홍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기억은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의 욕망에 따라 변질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마다 기억이 다른 것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이야기의 구조와 닮아있다. 사건을 맞는 ‘나’라는 주인공이 있고 내가 겪는 사건의 원인과 전개 과정 그 결과, 사건을 통해 얻은 나의 감정과 생각 등이 한데 묶여 기억을 구성한다. 각자의 변수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각색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월터 피셔(Walter Fisher)는 인간을 내러티브적 존재로 보았다. “사람은 이야기하는(Story Telling) 동물”이라는 명제는 인간 본성의 실체를 묻는 질문에 그가 내린 결론이다. 그는 인간의 삶 자체가 인물의 독특한 고유성, 그 사이의 갈등, 시작과 전개 과정을 거쳐 끝을 맺는 지속적인 이야기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특히 피셔는 자신의 이론 ‘내러티브 패러다임’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학문의 역사에서 그동안 간과되어온 감정, 가치 등 비이성적인 요소를 중시했다.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논리적 전개 외에도 인간의 감성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대상과 사건에 대해 호불호를 비롯한 복잡한 감정을 갖는다. 그 정서적 토대 위에서 고유한 시선이 발현된다. 똑같은 사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감정의 발판이 제각각 이어서다.


〈오! 수정〉이 여느 영화와 달리 다소 매끄럽지 않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감독의 영화적 장치일 테지만 제3자적인 카메라 시선이 인물을 따라다닐 뿐, 렌즈에는 별다른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다. 기억의 파편 조각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듯 거칠고 건조하다.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면 아마 이 영화와 비슷할 것이다.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만 존재할 뿐, 겉으로 드러나고 증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처럼 그려낸 영화에 우리는 낯섦을 느낀다. 이 아이러니는 그만큼 인간의 사고체계가 자의적임을 증명한다.


대중에 익숙한 영화적 문법은 ‘드라마’다. 기억은 장르적으로 보자면 다큐멘터리보다 드라마에 가깝다. 드라마에서는 누군가가 주인공이 되고, 그 주인공을 중심으로 모든 사건이 벌어지면서, 주인공의 감정 흐름에 따라 일화가 그려진다. 감정이 고조되면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갈등 상황은 긴박하게 연출한다. 사건은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고 일순간 종료된다. 우리의 기억 역시 드라마의 카메라처럼, 본인이 주목하는 대상과 현상에 더욱 몰입하여 편집을 거듭한다.



편집 후 완성된 필름들은 기억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쌓인다. 마치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에서 주인공의 기억이 여러 감정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저장된 것처럼 말이다. 나의 경험이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건은 기억 속에서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만하고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만한 기억은 계속해서 소환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어떤 기억을 불러내느냐는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사건을 의미 있게 기억하고 해석하느냐, 어떻게 사건을 편집하느냐의 문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와도 직결된다.


글쓰기는 결국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이다. 기억 속 이야기 덩어리들은 요리를 위해 준비된 냉장고 속 식재료들과도 같다. 냉장고가 가득 차 있으면 끼니가 다가와도 걱정이 없듯, 기억 속 이야기 저장고가 가득하면 글을 쓸 때도 거침이 없다. 어떤 글이든 자신만의 요리로 풀어낼 자신감이 생긴다. 이야기를 잘 정리하고 저장해두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평소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세심하게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기록하는 것은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된다.


요즘은 가볍게 글쓰기를 이어가기에 좋은 환경이다. 개인 블로그, 소셜 미디어가 넘쳐나고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나 역시 작은 에피소드들을 페이스북에 자주 기록하는 편이고, 글감이 쌓이면 이것을 좀 더 긴 콘텐츠로 재구성하곤 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이라는 공간은 비교적 손쉽게 독자의 솔직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글쓰기 연습을 할 수 있다.



작은 사건들을 의미 있는 이야깃거리로 간직하다 보면, 일종의 패턴을 발견하는 경우가 생긴다. 기자들은 “케이스(사례) 3개만 있으면 기사를 쓸 수 있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단편적인 사례가 반복되는 것은 어떤 현상의 큰 경향성을 보여주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이야기의 패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를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때로 이러한 사례들이 쌓이고 쌓일 때,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할 사람이 오직 나뿐이라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기기까지 한다.


이야기는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 어떤 마음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도 다른 이야기로 변주된다. 같은 책, 같은 영화라도 10대 때 보는 것과 40대 때 보는 것은 감상평이 다르다. 20대에 겪은 아프기만 한 이별의 기억은 10년 뒤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는 기억 속에서 새롭게 써나갈 수 있다. 달라진 시각을 통해 자신의 성장이 증명되기도 하고, 과거의 오류를 고치고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기억은 내가 어떻게 꺼내 마시느냐에 따라 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는 하룻밤을 보내고 여자를 죽이는 포악한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 목숨을 구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은 듣고자 하는 욕망과 만나 폭력과 죽음의 위기를 사랑과 삶의 에너지로 변화시킨다. 이야기의 힘은 그만큼 강력하다. 이야기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이야기 속을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야기 덩어리를 엮은 글은 삶의 의지이자 욕망의 실현이다. 글쓰기는 그렇게 원초적인 에너지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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