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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Nov 23. 2018

당신은 자신과 대화하십니까?

1-2. 자아를 찾아가는 글쓰기

문학, 철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일본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성으로 손꼽히는 우치다 다쓰루(內田樹)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이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무엇을 쓸지, 어떻게 쓸 수 있을지 명료한 확신 속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아무리 천재 작가라 할지라도 일필휘지로 한 번에 글을 써내는 일은 드물 것이다. 유시민이 구치소 바닥에서 단 한 번의 퇴고 없이 〈항소이유서〉를 써내려갔다지만, 물리적으로 글을 수정할 수 없던 상황 속에서 그는 아마 머릿속에서 수백 번 수천 번 자신의 글을 고쳐 썼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고를 쓴 기간만큼이나 퇴고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글을 단단히 굳게 만들기 위해 두드리는 집요한 ‘망치질’을 사랑했다.



어제 썼던 글을 하루 지나 보면 새롭고, 한 달 지나 보면 다른 이가 쓴 것 마냥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고쳐도 또 새롭게 써야 할 것이 뾰족하니 튀어나와 보인다. 과거에 쓴 글 속에서 예전의 나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때도 있고, 낯설게 느껴지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의외의 통찰을 얻을 때가 있다. 왜일까. 우리가 매일 같이 스스로를 갱신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는 내면의 자아가 해체되고 분열되며 재구성되는 복잡한 경험을 한다. 때로는 나 자신조차 몰랐던 내 안의 욕망과 의지가 튀어나오고, 때로는 자기 안의 확고한 논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모순에 빠진다. 대체로 글을 쓸 때는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글을 쓰는 도중 충돌하는 논리 가운데 보다 우세한 한 가지 방향을 선택하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결론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다르게 방향을 틀기도 한다. 타인을 설득하기 이전에 글의 최초 독자인 자신을 납득시키는 과정이다. 글의 완결을 향해 달려가면서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듭 확인한다.


우치다 다쓰루의 말처럼, 우리는 글을 쓰는 도중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지지하는지 계속 발견해간다. 그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글을 완성하는 순간까지 자신 안에서 수없이 갈팡질팡하며 정체성을 찾아간다. 도입에서 쓴 이야기를 부드럽게 이어가기 위해, 논리의 줄기를 찾고 설득력 있게 전개하기 위해, 마지막에 쓰고자 하는 결론을 별러내기 위해. 수천 번이고 수만 번이고 자신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끄집어내 살펴본다. 성별, 세대, 출신, 지위, 계급, 관계…. 그 사이에 충돌은 없는지, 있다면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지, 어떤 것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지향할 것인지. 끊임없는 자기 질문과 응답이 이루어진다.


누구나 언뜻 보면 충돌되거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정체성들을 한데 품고 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면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비슷한 성향과 환경을 갖고 있어서 사회적으로 하나의 범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생각과 경험이 세밀하게 다르다. 각자의 다채로운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다양한 층위의 인격들이 어우러져서 우리는 각자 자신으로 거듭난다. 각기 존재하는 내면의 모순, 개별적 취향과 선택, 환경의 변화와 영향력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개인의 유일성, 인간의 다양성이 발현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 1981년생, 대구라는 보수적인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 반대로 진보 성향의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한 경력, 기혼, 유자녀, 육아로 인한 퇴사 등. 어떤 것은 태어나며 부여받았고, 어떤 것은 내 선택의 결과다. 이미 지나온 내 삶의 증거들은 부조화와 모순적인 요소들로 쌓여 있다. 누군가에게 나라는 사람은 출신 지역이나 기혼 여성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인 사람일 수도, 또 다른 이에게는 여성주의적 면모라든가 출신 언론의 정치 성향으로 보아 진보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나이 서른여덟인 현재의 내게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들도 퇴적되어 있다. 사춘기를 맞이하던 열세 살의 소녀, 낯선 연애에 빠졌던 스물둘의 여자, 새 생명의 경이로움에 놀라던 서른셋의 엄마가 내 안에 있다. 은퇴와 노년, 죽음이라는 그려진 미래 속 가상의 나 역시 현재의 나를 구성한다. 다양한 층위의 자아는 삶의 순간마다 시시때때로 소환된다. 그것은 마주한 타인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낯섦과 두려움도 끄집어낸다. 그 경험마저 또 쌓이고 쌓이면서 나만의 세계가 갱신된다.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의 세계가 된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면 글쓰기가 어렵다. 스스로를 드러낼 수가 없어서다. 자기 세계가 갖는 가치를 표현할 수도 없다. 글쓴이의 인격이 담기지 않은 글은 타인에게도 매력을 주지 못한다. 독자들은 글쓴이의 닫힌 마음을 금세 알아차리고 자신도 마음을 바로 닫아버린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글은 설득을 할 수도, 울림을 줄 수도 없다. 비록 자신을 끄집어내어 그 안의 모순을 맞닥뜨리는 것이 고통일지라도, 온전히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고행과도 같은 노동을 이어가야만 한다.



몇 권의 책을 쓴 경험 때문인지, 종종 나에게 “책을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묻는 이들이 있다. 또 누군가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글쓰기를 갓 시작한 사람들에게 내가 권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이야기를 쓰라는 것이다. 언론사 입사 시험에서 치르는 글쓰기 과목 중 하나는 ‘작문’으로, 하나의 시제를 주고 자유롭게 글을 쓰게 한다. 일종의 백일장이다. 작문 시험을 판가름하는 것은 도입부인데, 많은 수험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글을 열곤 한다. 나 역시 식상한 사례를 끌어와 글을 시작할 바에야 자신의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훨씬 낫다고 본다. 글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개성을 선보일 수 있어서다.


물론 일상을 단순하게 적는 일기나 살아온 일생을 방대하게 기록하는 전기를 말하는 건 아니다.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려면 그만큼 무겁고 날카로운 분석이 필요하다. 개인의 삶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으므로, 개별적인 일화는 사회·정치적 혹은 철학적 주제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가 글감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그 경험이 관통하는 일반화된 명제가 있어야 한다. 주제를 꿰뚫는 압축적인 예시로서 현상의 정확한 단면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방해할 위험성도 있다.


이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쓰려면 자신을 잘 알고 객관화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먼 곳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글감을 찾되, 개인의 이야기가 보다 큰 거시적 맥락에서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발견하는 연습은 분명히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된다. 그러려면 자기 삶을 낱낱이 뜯어보고 그 구체성을 맥락화해야 한다. 나를 낱낱이 해체하고 관찰하고 비판하고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 속 내 좌표를 확인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해 속속들이 탐구한 이가 쓴 글은 그만큼 논리적이고 선명해질 가능성이 높다.


글쓰기는 존재를 증명하고 개인의 고유성을 발견해가는 작업이다. 글 읽기, 책 읽기가 즐거운 이유는 우주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다. 낯설고 괴이한 글이라 하더라도 읽는 이 역시 글쓴이의 세계를 상상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글을 쓰며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해야 한다. 자신이 살아온 삶, 그 경험의 힘을 믿고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 값지다고 믿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글은 힘이 있다. 살아 있는 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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