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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tlife noah May 12. 2023

희망퇴직을 선택하고 육아를 하고 있어요!

과거의 생각

나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다. 어렸을 때 가부장적이었다고 생각이 드는 인상적인 기억 중에 하나는 명절에 음식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있던 사촌 누나들이 실수를 했다고 꾸중을 듣고 있었고, 아무것도 안 하는 나는 듬직하게 얌전히 앉아 있다고 칭찬을 들었다. 주변 모두가 당연시하는 그 분위기에 어렸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은 충분하지 않은 형편에도 항상 동생과 나는 부족함 없이 챙겨주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동생과 나는 충분히 먹고 필요한 것을 획득하며 부족함이 뭔지 모르도록 자랐다. 어린 나이에는 부모님의 헌신적인 모습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왜 자신을 챙기지 않고 손해를 보면서 살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모님 스스로를 좀 더 챙기라고 불만을 가졌었다. 분명 불만이었는데 이런 불만이 쌓이면서 자라다 보니 가족에 대한 소중함으로 바뀌었다. 이런 유년시절의 영향일까? 현실을 모르던 20대의 어린 시절에는 아이가 생기면 둘 중에 한 명은 아이를 위하여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육아를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둘 중에 한 명은 나도 될 수 있다고 주장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무의식 중에 내가 될 확률은 적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정말 우리의 아이가 생기고 나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내가 쉽게 생각한 이상적인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직면한 현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난 아래의 문장을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희망퇴직을 선택하고 육아를 하고 있어요!


이렇게 간단하게 적을 수 있는 한 문장을 난 왜 쉽사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힘들까? 아무리 깊은 고민 후에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했지만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희망퇴직을 하고 육아를 한다는 게 주변에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정확히 내가 의도한 문장은 아래 문장이었다.

나는 퇴직을 선택하고 육아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의도치 않게 퇴직이 희망퇴직으로 바뀌었다. 내가 육아를 위해 퇴직을 결심했다가 희망퇴직을 하게 된 자세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나의 결심을 다시 굳게 다지는 작업이 될 수 있어 보이므로 해당 내용을 이 글에서 공유하도록 하겠다.


퇴직 결심

나는 우리의 소중한 아이를 볼수록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실 막 태어난 직후에는 아내가 육아휴직을 사용했고 나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서 딱히 이런 고민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바라보고 키우는데 집중하면서 점점 우리 아이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 점점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내가 보지 않고 있던 미래가 점점 걱정되었다.

 

우리가 현재 느끼고 있는 행복이 아내의 육아휴직이 끝나고도 지속될 수 있을까?
둘 다 일을 해도 우리의 소중한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우리와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은 아내보다는 나였다. 아내는 남들처럼 어린이집에 맡겨서 키우면 어떻게든 키울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였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남들처럼 이라는 말을 싫어하기도 하고 과거의 생각도 있다 보니 한 명은 짧은 시간이라도 육아에 전념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자신의 불편하고 어려운 부분을 표현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겨놓는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고, 실제로 찾아보니 3살까지는 부모의 손에서 자라는 게 좋다는 내용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3살까지는 우리가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와 달리 육아를 누가 할지 생각을 해보니 당연히 해당 결심을 한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맞벌이를 포기하는 것이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므로 우리가 현재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일지에 대해서 더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맞벌이를 통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니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바로 돈과 커리어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정말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지 따져보았다.

첫째, 아이와 우리를 위하여 돈이 더 필요할까? 일단 돈이 더 필요한 이유는 여유를 가지고 행복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 명이 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부모가 모두 육아의 스트레스를 훨씬 더 받아야 하고 아이에게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돈으로 얻을 여유와 행복이 한 명이 더 일하게 되면서 잃게 되는 여유와 행복보다 많을지 비교를 해서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상황을 보니 다행히도 당장 한 명이 번 돈으로 먹고살기 힘든 수준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가 벌어올 돈이 정말 많아서 많은 여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특히, 맞벌이를 하면서 우리 부부가 더 나아질 삶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해 보니 평소에 소비가 많지 않은 우리 부부에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혹시 모를 미래에 대한 대비였다. 사실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현재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득이 없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둘째, 커리어를 유지하고 싶은가? 아이를 낳아도 부모의 삶은 중요하다. 실제로 부모가 긍정적으로 잘 살아야 아이도 좋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데 정말 나는 나의 커리어를 버리고 싶지 않은가? 아니다. 나는 사실 커리어에 대해서 오히려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까지 살아온 나의 커리어를 기준으로 미래를 그려보니 미래의 나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을 변화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물질적인 것과 더 나은 생존을 쫓으며 열심히 커리어를 쌓고 있었다. 물론 물질적인 것도 많이 얻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당장 육아를 위해 잠시 쉬는 것이 나의 커리어를 아예 초기화시킬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불만 있는 커리어를 방치하고 끌고 가는 것이 나의 커리어를 더 망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쉽지 않겠지만 육아를 하면서 틈날 때마다 노력한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커리어를 바꿀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스스로 퇴직을 안 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까지 나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퇴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내를 설득하기

퇴직을 결심하는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굉장히 쉽게 결정한 것처럼 표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해당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내적갈등이 일어났다. 그래서 난 이런 내적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조심히 아내에게 해당 내용을 공유했다. 나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이다 보니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실제로 아내를 설득하는 동안에 퇴직을 거의 결정한 상태였지만 아내에게는 아직 결정은 못 내렸고 각 선택의 장단점이 있으니 신중히 같이 고민해 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내가 확고한 이유를 가지고 결정을 내렸어도 해당 이유를 아직 깊게 생각도 안 해본 아내에게 공유하는 것은 너무 무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어떤 관점에서는 굉장히 무책임한 생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쉽사리 내용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긴 시간을 가지고 아내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시도했었다. 나의 많은 걱정과 달리 아내는 매번 나의 생각을 존중해 줬다. 오히려 직접적인 퇴직 결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자신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쉽지 않은 선택을 하려 하니 응원과 지지를 해주고 싶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아내가 너무 고마웠고 어렵게 고민한 문제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해당 문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피어오르는 걱정

아내를 설득 후 우리의 방향이 정해지고 나니 오히려 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고 내가 생각한 대로 잘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퇴직 후의 육아가 아니다. 이상적으로는 아이에게 필요한 좋은 육아를 하면서 내가 원하는 커리어를 도전하도록 커리어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육아도 커리어도 실패할 수 있다. 원하는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기쁨과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돌아가면서 나의 감정을 깨웠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면 나의 세상은 변화하지 않는다. 현재의 세상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다른 행위를 취하는 것이 현재의 세상을 단순히 바라만 보는 것보다는 무조건 올바른 자세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이 선택이 옳다고 생각해도 내면에 피어오르는 걱정을 근거 없이 자신감으로 전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나의 결정으로부터 당당해질 수 있을까?


사실 글에서는 많은 내용을 적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겉모습은 대한민국에서 육아를 하는 백수 남자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의식을 안 하려 해도 이번 일은 신경이 쓰였다. 양쪽 부모님에게 해당 내용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나의 지인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확고하게 원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결정이므로 당당해야 맞는데 알게 모르게 숨고 싶고 계속 작아지고 있었다. 사실 이런 결정을 아내가 했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결정을 남자가 해서 눈치를 봐야 하는 세상에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나면서 세상 탓을 하는 것을 보니 분명 변화를 위해 내가 도전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오히려 명확해졌지만 당당해지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퇴직이 희망퇴직으로

이런 많은 걱정들이 계속 내면의 나와 싸움을 하고 있는데 운명이 나의 결정을 도와주기 위함인지 방해하기 위함인지 모르겠지만 회사의 경영악화로 희망퇴직을 받기 시작했다. 회사가 힘들어서 많은 수의 직원들에게 나가달라고 하는 상황이므로 이미 나갈 결정을 한 나에게는 고민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걱정만 하느라 결정을 미루던 스스로에게 빠른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그런데 퇴직에서 희망퇴직으로 희망이라는 더 좋은 키워드가 추가되면서 나의 결정이 바뀌었을 뿐인데 내면적으로는 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많은 고민 끝에 내가 능동적으로 결정한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회사 상황으로 인한 수동적인 퇴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반복해서 생각했던 것들이 희망퇴직에 대한 변명으로 느껴졌다. 또한 희망퇴직이라는 키워드가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실제 내가 알고 있는 어려운 희망퇴직과 상황이 완전히 다른 희망퇴직이지만 마냥 쉽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특히, 양쪽 부모님에게 희망퇴직이라는 용어를 꺼내서 위의 내용을 설명한다는 게 그려지지가 않았다. 원래 내가 생각했던 예상 모습은 기존 회사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서 당당히 떠나오는 도전자였는데 갑자기 젊은 나이에 희망퇴직을 하는 비운의 직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특히, 나는 매니저직을 맡고 있어서 해당 상황을 다른 팀원들에게 전달하고 위로하고 정리하는 작업도 같이 진행해야 했다. 희망퇴직을 준비하는 내면의 나와 퇴직을 준비했던 내면의 내가 계속 충돌을 했다. 


복잡한 실타래처럼 걱정들이 계속 꼬여가고 있었지만 하나씩 당당히 마주치고 풀면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최대한 가까운 근처부터 내가 표현하고 싶은 모습으로 최대한 당당하게 나의 결정을 전달했다. 너무 당당하게 전달하려다 보니 오히려 깊은 내용은 생략되고 그만두고 육아한다는 피상적인 내용만 전달되기는 했지만 스스로에게 당당해진다는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다.


당당히 살아가자

결국 일을 벌여버렸다. 일을 벌이기까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웠지만 이제 시작임을 알고 있다. 지속적으로 비슷한 고민이 반복될 것이고 새로운 고민도 추가될 것이다. 그리고 막상 진행하면 크게 방향이 다시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 하나만은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말해주고 싶다.


절대 두려움 때문에 현실에 충실할 수 있는 결정을 미루지 말고 진행할 것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번 한 번만으로 살고 있는 현실이 지속적으로 만족스러워지지도 않고 생각한 것처럼 구체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때 두려워하기보다는 다시 현실에 충실해질 수 있는 결정을 미루지 말고 진행하라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말해주고 싶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이 시대에 살아있는 것일까? 적어도 당당히 살아있다는 표현을 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난 이 세상에서 죽어 가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많은 어려운 선택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다양한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 사람들도 있고 다른 어려운 고민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므로 모두를 존중하고 격려하고 싶다. 두려워말고 모두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나는 희망퇴직을 선택하고 육아를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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