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상실감에 젖은 청춘의 모습 간결하고 감각적인 문체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문학사상, 2006)는 197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상실감에 젖은 청춘의 모습을 담아낸다. 일본의 전통 문학과 달리, 작가는 자기만의 간결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내용은 주인공인 29살 화자가 21살 때 여름방학 동안 고향에 내려와 18일 동안 보냈던 이야기다. 화자는 별명이 ‘쥐’인 친구와 함께 제이스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한동안 방황하던 ‘쥐’는 소설을 쓰겠다며 말한다. 어느 날, 나는 제이스 바 화장실에서 쓰러진 10대 여자를 도와주고 그녀의 사연을 들어주면서 가까워진다. 방학이 끝날 무렵 고향을 떠나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바람같은 인생사에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
소설은 인생이란 바람 같다고 말한다. 잡고 싶은 순간도 흘려보내야 하고, 딱 달라붙어 있는 고통스런 시간도 결국 지나간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상실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충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연히 만난 10대 여자는 힘들었던 삶의 여정을 화자에게 고백한다. “머리 위에선 언제나 나쁜 바람이 불고 있어” 화자는 그녀에게 “바람의 방향도 때가 되면 바뀔 거야”라고 대답한다. 여자는 "이런 이야기를 한 건 네가 처음이야."라는 말을 여러 번 말한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이 야기를 들어주는 존재를 만난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위로 중에는 편지도 있다. 편지를 쓰는 행위는 당사자가 상황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하나의 의지의 표현이다. 또,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바람에 실려 보내는 것과 같다. 작품에서는 라디오 디제이가 사람들 사연을 읽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사연마다 아픔과 어려움이 배어 있다. 사연 중에는 척추 신경 계통의 병으로 3년 동안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회복 가능성이 삼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무엇인가 배울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이라도 살아갈 수 있다.
작가는 글쓰기가 “요양의 작은 시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지 않더라도 “현재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나아가 훗날에 “구원받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화자도 그의 친구 ‘쥐’도 글을 쓴다. 가난했던 화자는 일찍이 하트필드 작가를 알게 되어 글쓰기를 통해 상실을 극복하려고 했고, 부자이지만 내면적 상실감에 젖어 끝도 없는 방황하는 ‘쥐’도 소설을 쓰며 자신을 찾아간다.
노트 한가운데에 줄을 하나 긋고 왼쪽에는 그동안 얻은 것을, 오른쪽에는 잃은 것을 썼다. 잃은 것, 짓밟아 버린 것, 벌써 오래전에 버린 것, 희생시킨 것, 배반한 것…… 나는 그것들을 끝까지 다 쓸 수가 없었다
인생은 상실의 연속
인생은 상실의 연속이 아닐까. 무언가 가지고 얻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매 순간 우리는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놓치는 게 더 많다. 상실은 방황과 권태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극복과 회복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화자가 교제했던 10대 여자는 왼속 새끼 손가락을 8살 때 잃어버렸다. 화자는 그 왼손을 주의 깊게 살펴 본 후 이렇게 묘사한다.
칵테일 잔처럼 싸늘하고 작은 손에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네 손가락이 손가락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진공청소기의 모터에 새끼손가락이 끼어서 잘려나갔다는 여자의 설명에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라고 묻는다. 여자는 잊어버렸다며 새끼손가락이 없는 게 별로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의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 셈이지. 우주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삶도 죽음도 없어. 그냥 바람이지.
상실과 방황은 인생의 기본값인 것 같다. 인생은 한번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지만, 가끔 그 바람 속에서 수많은 사연이 담긴 노래처럼 들릴 때도 있을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적극적으로 들어준다면 화자가 말하는 ‘구원’에 닿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