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원청:잃어버린 도시>를 읽고
위화의 <원청:잃어버린 도시>(푸른숲, 2022)은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를 살아냈던 인간의 삶을 그려낸 장편 소설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인 위화가 집필기간 23년을 거쳐 완성한 신작이다. 그는 20세기 중국을 문학으로 복원하는 목표로 여러 작품을 발표한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을 시작으로 하는 <인생>,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허삼관 매혈기>, 자본주의를 수용한 중국 사회를 다룬 <형제> 등으로 평단과 대중에게 인정받는다. 위화는 1900년대초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원청>을 발표함으로써 중국의 20세기 지형도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아내가 있는 곳, 원청을 찾아나선 '린샹푸'
어느 날, 청년 '린샹푸'에게 ‘샤오메이’와 ‘아청’ 남매가 찾아온다. 린샹푸는 '원청'에서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그러다 아청은 떠나고 샤오메이만 남는다. 린샹푸는 샤오메이와 살다가 혼인하고 딸을 얻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샤오메이가 사라진다. 린샹푸는 딸을 가슴에 품고 샤오메이를 찾기 위해 원청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난다. 하지만 원청을 찾을 수 없었고 원청과 비슷하다고 느낀 '시진'에 머물게 된다.
린샹푸는 '청융량'과 '리메이롄' 가족을 만나 같이 살면서 목공소를 운영하며 안정적인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북양군과 국민혁명군이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토비떼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토비들과 설전을 벌인다. 린샹푸는 납치 당한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시대적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
소설은 시대적 고통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청나라가 무너진 뒤 수많은 전란이 발생하였다. 그 와중에 부유한 사람들을 납치하여 고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토비들이 극성이었다. 마을을 약탈하고 인질들을 고문하는 그들의 악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거나 죽음을 당했다. 토비를 소탕해야할 관군들은 도리어 그들의 돈을 받고 총과 탄약을 파는 형국이었다. 린샹푸의 딸 ‘린바이자’도 납치되었다가 친남매처럼 자란 ‘천야오우’가 대신 끌려간다. 그는 토비에게 귀를 잘리고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러다 토비 중에 덜 악한 ‘스님’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 난세에 농사를 지으면 토비한테 약탈당하거나 죽고, 토비가 되면 약탈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천융량이 대꾸했다. "난세에 토비로 사는 게 창피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토비라도 선한 마음을 가져야지요.
난세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 존중의 모습
난세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각자의 환경 속에서 적응하거나 혹은 저항하며 산다. 토비가 될 수밖에 없을 참담한 상황도 있지만 끝까지 인간 존중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천융량은 갓난 아기를 안고 나타난 린샹푸를 아무 조건 없이 자기 집에서 머물도록 해준다. 마을의 부호인 '구이민'은 부자임에도 어려운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마을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린샹푸는 토비에게 납치 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잔인무도한 토비를 죽이자는 아들의 말에 천융량은 “절대 안 돼, 우리는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구하려는 거야.”(p.333)라며 거절한다.
그는 엄동설한에 죽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 일부를 그에게 나눠준 거였다. 린샹푸는 그들의 큰아들을 무릎에 앉힌 뒤 입으로 죽을 불어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먹이고 자신은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원청'의 의미
소설의 제목, '원청'이란 무엇인가. 원래는 공간의 의미로 설정되어 있다. 아청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지어낸 지역이지만 린샹푸에게는 아내가 있는 희망의 장소이다. 아내가 있을 원청을 찾다가 원청과 비슷하다고 여긴 시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딸을 키워낸다. 원청이라는 희망이 없었다면 린샹푸는 시대적 고통과 개인적 아픔에서 살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작가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원청이 있”(p.5)다고 말한 것이리라.
결국 린샹푸는 시진에 머무르며, 원청을 가지 못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소설 후반부에서 독자는 린샹푸가 그 원청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인생이란 원청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원청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원청이 어디 있는데?”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 뜬구름 같은 원청은 샤오메이에게 이미 아픔이 되었다. 원청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역동적인 중국 역사 속에서 고통 받았던 민초를 향한 작가의 위로와 격려를 느낄 수 있다. 백성들이 유랑과 방황을 끌어안고 언젠가는 도달할 원청을 향해 좌절하거나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 같다. 위화 소설을 좋아하는 분이나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