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고 있어도 더 안고 싶어

넷째의 치명적인 필살기

by 책선비

초2 학년 넷째 진율이는 키도 작고 마른 몸으로 나에게폭 안기는 것을 좋아한다. 아기처럼 가로로 누워서 가장 귀여운 척하며 과장되게 웃는다. 하회탈처럼.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말이 진부하지만 어쩔 수 없다. 딱 그 말 그대로다. 안고 있어도 더 안고 싶다. 몸이 부스러져라 껴안아서 아주 작게 만들어 하루 종일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심란할 때마다 꺼내보고 싶다.


연애소설의 낯간지런 사랑의 말이 왜 반복되는지 알 것 같다. 넷째를 낳기 전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사랑의 말은 좀 뻔하게 들렸고, 할 말이 없어서 대충 던지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정으로 묶인 관계이니 그냥 서로 받아들이고 자기 위치에서 성실하게 지내면 되지, 왜 굳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넷째를 낳고 달라졌다. 나도 모르게 그 닭살 돋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니, 너무너무 왕창 사랑해, 와 미칠 것 같아. 우주 최강 귀요미"


1,2,3호에게는 이런 표현에 인색했다. 아이들 어릴 때 영상을 한 번씩 볼 때 들리는 내 목소리는 정말 딱딱하고 날카로웠다. 아이들이 예뻐서 찍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사소한 일로 아이들을 혼내고 있었다. 특히 1,2호 어린 시절 영상은 점점 보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그래도 한 번씩 같이 보고 나면 지금 사춘기를 겪는 두 아이에게 사과한다. 너무 많이 혼내서 미안하다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너무 서툴렀다고. 지금부터라도 많이 안아주고 사랑한다 해줄게라고.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너무 놀랍고 지금이라도 이 말을 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며 마음을 쓸어내린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하고 예쁜 만큼 사랑하고, 잘 못하고 부족하면 미워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부모 자식 관계라면 더 잘할 수 있도록 지적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움을 주는 게 사랑이며 의무라고 여겼다. 그런데 넷째를 낳고 보니 잘하고 못하고 상관없이 그냥 사랑스러웠다. 형들과 누나가 그 나이때 했던 것보다 더 서툴고 부족한 것 투성이로 보여도 마냥 사랑스럽다. 왜? 이유 없이 사랑할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하게 너무 이상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 자체로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이상적이고 어쩌면 하나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는데 내가 그런 사랑의 실체를 겪고 있다니, 나도 내가 낯설었다.


5살이 된 막둥이에게 처음으로 혼을 냈다. 아이는 자주 밥도 안 먹고 아이패드만 찾는 것처럼 보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따끔하게 혼내는 내 모습에 아이는 잠깐 당황하며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했다. 그 모습에 나도 잠시 움찔했다가 이번에 꼭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말을 하려고 입을 떼려고 했다. 갑자기 아이는 하회탈 얼굴로 돌변하더니 두 손을 턱에 가져가고는 꽃받침을 했다. 선처를 구하는 눈빛으로 우는 소리인지 웃는 소리인지, 멜로디까지 가미하여 노래를 불렀다. "아~~~ 이~~~ 잉"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사촌들 앞에서 갈고닦은 필살기 공연 중


도대체 저건 어디서 배운 걸까. 남매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살기인가. 1,2,3호에게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형들과 누나가 했다 해도 내가 웃었을까. 나는 저 애교에 무너졌다. 동시에 '이게 혼낼 일인가?' 의문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그냥 넘어갔다. 자신의 애교가 효과 백배라는 것을 알게 된 막둥이는 사고를 치고 나면 곧바로 애교 필살기로 무마시켰다. 그것도 여러 버전으로. 하나가 통하지 않으면 업그레이드를 시켜서 진화시켰다. 나는 그것을 관람하는 재미에 빠져서 혼내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소리 지를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넘어가도 되는 일에 무수히도 아이들을 다그치고 쏘아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동안 예민하게 반응하고 아이들을 혼냈다는 결론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아이들을 잘 키운다는 소리는 듣지 못해도, 잘못 키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친 것일까. 아마도 잘 키운다는 말도 듣고 싶었나 보다. 아이들을 사랑해 주기보다 부족한 모습만 고치려고 애를 썼던 날들이었다. 지금은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이 아니면 혼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혹시 아이를 너무 방치하냐고 누군가 뒷말을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제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내가 틀렸다면 그때 다시 아이와 소통하면서 고민해 보겠다. 사랑의 힘은 조금 더 기다리며 지켜보게 만드는가 보다.


사랑을 몰랐던 나는 넷째를 낳고 사랑의 실체를 마주하고 있다. 4명의 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도 참으로 사랑스럽다는 것도 지금에서야 받아들인다. 능력 없고 해 놓은 거 하나 없다며 내가 나를 사랑해주지 못했는데 아이들은 그냥 마냥 사랑해 준다. 우리 지금처럼 사랑하고 살아가길. 사랑이 흐려질 때 한 번씩 서로의 필살기로 불을 지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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