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지 않아도 괜찮아

윤이형의 <쿤의 여행>을 읽고

by 책선비

주인공은 '쿤'을 뜯어내는 수술을 하고 마흔에서 열일곱 살이 된다. '쿤' 없이 살기 위해 옛 친구도 만나고 대학교를 찾아간 뒤 그 시절 자신이 하고 싶었던 연극부에 다시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러다 연극 연습 도중에 진정한 홀로서기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엄마와 자신을 수없이 폭행했던 아버지를 찾아서 사과를 요구한다. 주인공은 아버지와 화해를 한 뒤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주인공은 계속 '쿤'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쿤을 뜯어냈다. 말 그대로, 뜯어냈다. 길고 힘든 수술이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내게 붙은 쿤은 내가 자랄 모습으로 자랐다. 처음에는 우무나 곤약과 비슷하게 물컹거리는 회백색 덩어리였던 그것은 다 자라자 무표정한 마흔 살 여자의 모습으로 굳었다. 윤기 없는 머리카락에 작은 눈, 넓은 어깨와 전체적으로 약간 살집이 붙은 몸을 지닌 여자였다. 예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이 없어선지 다소 답답해 보였다.


어린 시절, 슬픈 현실을 잊기 위해 ‘쿤’과 같은 것을 의지하려고 했다. 공부를 잘 해서 엄마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든지, 현실과 완전 다른 세계를 설정하고는 그곳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망상 같은… '쿤'과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물음표가 내리누르는 것 같았고, 텅 빈 객석이 나를 적대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랬다. 그게 내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눈을 깜빡일지,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조차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있고 싶지 않은 장소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그런 곳을 상상해, 가장 어둡고 무겁고 슬픈 곳을. 그리고 거기서 뛰어나와 달리기 시작해. 나 자신이 죽도록 싫어지면 난 그렇게 해. 달리다 보면 반대편의 장소가 떠올라. 내가 되고 싶었던 내가,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져.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여전히 20살 같이 어린 마음을 발견하기도 하고, 과거 아쉬웠던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후회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실수하기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 제대로 빨리 자라고 싶은 마음' 다른 '' 찾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것을 찾아 의지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본다. 이것저것 해보려고 욕심도 부린다. 글도 잘 쓰고 싶고 독서수업도 잘하고 싶고 영어도 잘하고 싶고 번역도 해보고 싶고... 빨리 자라고 싶은 것이다.


고통과 상처 앞에 살아남기 위해 선택했던 것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무척 힘들다. 겨우 극복했어도 비워진 그 자리를 온전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 더 고달플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무덤 앞에 잠깐 서 있다가, 흙속에서 벌레와 진물과 어둠을 생생하게 견디고 있을 내 어린 아버지에게 말해주었다.
괜찮아요, 자라지 않아도.
딸이 내 손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딸의 손은 따뜻했고, 내 손에 비해 아직 조그맸다. 그리고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남편과 딸의 손을 잡고 열다섯 살의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라지 않아도 괜찮단다. 그냥 비워진 상태로 가만히 있어보자. 너무 애쓰지 말자. 그냥 있는 모습대로...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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