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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Sep 01. 2022

아빠, 근데 달이 왜 자꾸 나를 따라와요?

 

 한 달에 한번, 한 권의 책을 읽고 온라인으로 독서모임을 한다. 코로나 때문에 시작한 온라인 모임인데 덕분에 발리에서도 꾸준히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와중에 다행인 일이다. 느릿느릿 독서모임의 이번 달 책은 고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집이다. 노을이 질 무렵 스미냑 바닷가 빈백에 앉아 책을 읽다가 ‘달구경’이라는 글에서 달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문장을 읽고 마음이 막 벅차다.


달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걸 알고부터는

내가 쓸쓸할 때는 달도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기쁠 때는 달도

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향집을 떠나 처음 서울에 와서

산동네 빈촌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었을 때

달이 서울까지 나를 따라왔다는 걸 발견하고는

얼마나 놀라고 반가웠던가

「달구경」 중에서


나는 달이 따라온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몇 살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아빠는 나를 껌딱지처럼 붙이고 어디든 다녔다. 일요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나서야 하는 조기축구회, 조기축구회에서 가는 봄맞이 야유회, 조기축구회에서 가는 가을 소풍, 조기축구회의 회식, 조기축구회의 단합대회. 축구를 너무 사랑해서 내 이름마저 차범근 선수의 딸 이름이랑 똑같이 붙여준 우리 아빠 인생에는 조기축구회가 한가득이다. 내 기억 속 아빠의 모든 일정에는 조기축구회가 따라붙는다. 동생은 아직 어려서 아빠의 외출엔 늘 나만 따라나섰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좋아하고 작은 고모에게 제인 에어를 선물했다던 나의 아빠는 내가 열네 살, 동생이 열두 살일 적에 돌아가셨다. 열네 살에 아빠랑 했던 이야기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몇 살 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대화는 잊히지 않는다.


그날도 조기축구회에서 단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어딘가 먼 곳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어느새 캄캄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다가

“아빠 근데 달이 왜 자꾸 나를 따라와요?”

하고 물었더니

“달이 하나를 너무 좋아해서 계속 따라오는 거야.”

어린 마음에도 이 말이 어찌나 두근두근하고 좋았던지 평생 잊지도 않고 산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더 만들 시간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평생 이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흐릿한 나의 아빠가 하나야 하고 부르던 건 생각나는데 도저히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용인에 있는 천주교 묘원은 지금이야 정비가 잘돼 있고 길을 다 닦아둬서 깔끔하지만 그 당시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원 여기저기 거대한 흙구덩이를 파고 있는 포클레인들에 지레 겁을 먹고 나중에 아빠 무덤이 어디 있는지 까먹을까 봐 묘비에 있는 번호를 열심히 외웠다. 어른이 되어 운전면허를 따고 혼자서도 아빠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땐 기쁜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힘들거나 세상에 지칠 때 찾아갈 수 있는 비밀장소가 생긴 것만 같았다. 아빠가 계신 자리는 지대가 높아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평일 늦은 오후 그곳에 가면 다른 사람들을 마주칠 일 없이 오롯이 내 세상이다. 고요함을 깨는 새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구름이 눈에 보이게, 하지만 천천히 흐른다. 모든 게 멈춰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멈춰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곳이다.


나는 계속 책장을 넘긴다. 달구경에서 간신히 하늘 올려다보며 눈물을 꾹 참았는데 또 다른 페이지에서 친숙함을 느낀다. 단지 장소를 묘사한 문장만으로도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지대가 높아 전망이 좋은데도 산꼭대기가 아니고 골짜기라 우리 동네처럼 아늑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규격화된 작은 비석도 마음에 들었다. 여긴 어떤 무덤도 잘난 척하거나 돋보이려고 허황된 장식을 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묘지이다.

「내 식의 귀향」 중에서


 작가님은 이곳에 남편과 아들을 묻고 본인도 그곳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는 기사를 뒤늦게 읽었다. 마음에 품고 사는  이야기가  맘인 것처럼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비밀스럽게 찾아가는 장소 이야기까지 쓰여있으니 활자들이   벌려 나를  안아주는 것만 같다.  이상 책을 읽다가는  바닷가에 사연이라도 있는 여자처럼 울어버릴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빠를 찾아가는   다른 무덤에 찾아가 꽃이라도 한송이 두고 와야지 하며 책을 덮었다. 마침 노을도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는지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달은 나를 좋아하나 보다.


가끔 어린이들이 "달이 왜 나를 따라와요?" 하고 물으면 "달님이 널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야." 하고 말한다. 언젠가 그 말이 어린이들에게도 밤하늘 별처럼 반짝거리는 기억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스미냑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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