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소중히 대하기 위한 깨달음 과정
어제는 술도 안 마신 사람들이 새벽 3시에 잠들었다. 열심히 일주일을 살아낸 두 사람이 그동안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쉴 새 없이 나누면서다. 인프제 둘이서 나누는 내향 직관의 이야기들은 지루할 새가 없다. 깨달음 위에 깨달음을 쌓아 올리다 보면, 이곳이 철학자의 연구실인지 집인지 헷갈릴 정도다. 동자 둘이 한 자리에 모인듯한 모양새다. (나이는 먹었지만 우리는 동자다.) 하지만 당시의 난 그럴만한 체력은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는 축제 스태프 근무로 하루 종일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모했다. 그리고 안 쓰던 외향감각을 사용하며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역동적인 협업을 이루는 일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과활성화된 에너지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다지 수다스러운 타입도 아니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버서커' 모드를 불사할 정도로 초인적인 정신에너지가 생겨났다.
진즉에 나가떨어졌어야 할 활동량이지만, 이렇게나 버틸 수 있었던 정신력은 어디서 어떻게 왔을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론해볼 수 있는 이유는 3가지 정도가 있었다. 첫째, 날씨의 변화로 더 이상 더위로 인한 체력 감소분이 사라진 탓. 두 번째, 1일 2명상의 생활화로 가용 가능한 정신에너지의 총량이 늘어남. 세 번째, 다음날 쓸 에너지를 끌어다 쓰고 있는 중.
세 가지 모두 그럴듯한 이유들이다. 축제의 (말 안 듣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무거운 기물까지 치웠지만 더위가 없는 덕에 쾌적하게 일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명상을 생활화하니 (누군가의 가족과 같은) 스태프에게 욕설을 서슴지 않는 진상들에게 정신적 에너지를 덜 받게 되었다. 그들의 삶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여유도 덤. 마지막으로 에너지를 잔뜩 끌어다 쓴 탓에, 글을 쓰는 지금도 당장 곯아떨어질 것만 같다.
몸의 주인은 자기 자신인데, 내가 나를 너무 학대한 건 아닌가 싶어 진다. 어느 순간 피곤함을 느끼는 상태를 '피곤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넘어, '내 몸이 피곤함을 느끼고 있네'로 조금 표현이 바뀌게 되었다. 같은 표현이지만 미묘하게 다른데, 후자가 더욱 자신을 객관화한 관점으로 마치 혼이 몸뚱이 속에 기생하는 듯한 관점과 깨달음이다.
태어난 이상 나의 혼이 이 몸뚱아리 안에서 한 백 년 살다 떠나야 할 텐데, 소모품인 몸뚱아리를 너무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되겠다. 몇 해 전까지 유행했던 욜로니 오늘만 산다니 불나방 같은 인생의 자세는 내 몸이 소모품이라는 인식의 부재 때문이겠다. 내 몸과 함께 오래도록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자기 자신을 더욱 아껴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