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담는건 어려운 일이다. 그 때의 내겐 훨씬 더 쉽지 않았다.
이호가 텃밭을 맡긴 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텅 빈 집에 들어가 앉아 유자차를 만들어 먹었다. 집은 방치되지 않았다. 먼지가 쌓일 법 할 때에도 매일 새 것 마냥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내심 '이호가 곧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적도 있었다.
달라지지 않는 빈 집과 유자차. 부모님 가게 일을 도와 소소하게 살며 이호와의 시간은 점점 과거로, 빛바랜 추억으로 변했다. 편지를 모아둔 상자는 한 번 읽은 뒤 열지 않았다. 텃밭에 허브를 키우기 시작했다.
'세연에게,
21살 생일 축하해.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가는거 같아. 벌써 사계절이 다 지나갔어. 그곳에서 여전히 눈을 쓸고 있을지 모르겠다.
종종 텃밭과 돌멩이들이 그리워. 여긴 의미보다 표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만 있거든. 엄마도 널 그리워하셔. 재미있는 친구라고 좋아하셨는데, 나보단 너를 더 아끼시는 것 같다. 직접 방문을 말씀 드렸었는데 줄곧 거절하셨어. 아마 다시 만나면 더 그리워 하실거라 자제하셨나봐.'
내가 느꼈던 희수의 차분하고 정제된 분위기와 달리, 그는 정이 많은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마음에 든 사람에게 정을 많이 주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왜인지 모르게 포근한 기분이 들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읽었다. 하지만 다음 내용에 금방 웃음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거절 하셔도 고집을 피울걸 그랬어. 이제 널 보러 가실 수 없게 되었거든. 발인을 마치면 우리가 함께 지내던 마을 앞바다에 모실 예정이야. 그 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생일 축하 편지에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서 미안해.'
수많은 감정이 요동쳤다. 희수의 죽음에 슬픔을 느꼈고, 이호와의 재회에 기대감을 느꼈다. 어느 쪽 하나도 우세하지 않은 균형을 이뤘다. 일을 마친 뒤,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상자를 가지고 이호의 집으로 향했다. 직접 키운 허브 잎을 조금 따서 차를 우려낸다. 뚜껑을 열어 편지를 뒤적인다.
'세연에게
10살 생일을 축하해. 너는 한껏 진지한 얘기를 늘어놓으면서도 결국 오렌지 사탕을 좋아하는게 정말 웃겨. 기분이 안좋은 날에도 오렌지 사탕 하나면 모든 분노와 슬픔이 가라앉는단 얘기가 생각났어. 너의 생일에 어떤 일이 생겨도 기분 좋길 바라는 마음이야.'
오렌지 사탕 한 알과 함께 시작한 편지였다. 실제로 그 날은 꽤 험난했다. 부모님과 함께 미역국을 먹었고, 유달리 많이 내렸던 눈을 쓸었다. 빗자루 손잡이가 길가 나무에 부딪혀 부러졌다. 그정도는 참을 만 했다. 이후로 눈길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어도, 갑자기 나타난 고라니에 놀라도 괜찮았다. 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와 위협했을 때 비로소 사탕 생각이 났다. 그 때 부드럽고도 잽싸게 무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래브라도 리트리버 특유의 온순하지만 책임감 강한 성품을 좋아하게 된 건 그 때부터였다. 이 작은 시골 마을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털, 절박하게 짖는 와중에도 잃지 않는 기품. 주인이 아니지만 위험에 처한 누군가를 보고 바로 나설 수 있는 정의. 나는 일순간 그 리트리버에게 매료되었다.
"테오, 잘했어."
무미건조한 표정, 하지만 온화한 목소리였다. 나의 예상과 맞아 떨어졌다. 그 개는 이호가 데려왔다. 나는 주저 앉은 채 멍하니 이호와 테오를 바라봤다. 멧돼지가 포박되어 끌려갔다. 저 멧돼지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생일에 저 멧돼지는 죽음을 맞이한다.
'너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친구가 생겼어. 아마 너도 분명 좋아할거야. 일부러 네 생일에 맞춰 데려오길 바란다고 전해뒀어. 이름은 테오야. 우리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고.'
사실 아직 잊지 못했다. 무수한 편지 내용을. 그리고 그를.
'테오도 분명 첫 만남 때 너에게 끌릴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