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로봇처럼 서 있었다. 테오는 멧돼지가 끌려가자 조용히 다가와 내 다리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이호는 언제나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더 속을 알 수 없었다.
"많이 놀랐겠다. 다친 데는?"
"괜찮아. 고마워.."
웅얼거리듯 감사 인사를 뱉고 나서 정신 차려보니 이호 집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유자차를 마시던 중 테오가 어디선가 담요를 물어다가 내게 건넸다. 그제야 긴장이 서서히 풀려 테오의 머리를 쓰다듬고 담요를 덮었다.
"생일 축하해."
이호는 냉장고에서 꺼낸 케잌에 초를 붙여놓고 단조롭게 말했다. 서프라이즈는 아니었다. 케잌을 꺼내고, 준비하고, 초에 불을 붙이고, 거실 불을 끄는 모든 과정을 보여줬다. 무드가 없다고 해야할 지, 말 할 때에는 솔직한 그답다고 해야할 지, 와중에 편지는 우체통에 넣어놨으니 집에 가서 보라는 점은 한결같았다.
"구하기 어려웠어.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한거야."
"고구마 케잌은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거야."
"너는?"
"나도."
열 살 어린 아이의 천진한 미소를 띠며 접시에 덜어진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단맛이 기분 좋았다. 하루가 어찌됐건 마무리가 오렌지 사탕이라면 괜찮을거라 생각했는데, 사탕은 다음을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게. 잘 지냈어?"
"응. 여긴 똑같지. 이호는?"
"나는 못지냈어."
스물 다섯의 이호, 그리고 스물 하나의 나, 세연. 분명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이 훨씬 길었는데, 떨어져 있던 1년의 공백이 더 크게 느껴졌다. 굳이 말하지 않았던 어릴 적 상상을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네가 사실 초능력자나 어딘가에서 쫓기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내가? 왜?"
이호는 그동안 못지냈다는 말이 무색하게, 나의 한 마디를 듣자마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책만 보는데, 희수 아줌마는 아무렇지 않았고."
"흔치 않은 풍경이긴 하지."
"일기에 암호를 숨길만큼 비밀스러운데, 머리도 좋았잖아."
"머리는 네가 더 좋았지. 학교만 다니고도 모든 문제를 다 맞췄으니까."
"내 성적표는 언제나 빵점이었어."
"그게 네 표현 방식이었겠지."
"내게 나비 효과를 알려준건 학교가 아니야. 이호 너야."
"텃밭을 지금까지 지켜준건 세연이 너고."
집 안에서 따듯한 유자차를 마시던 어린 아이 둘은, 이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어른 둘이 되었다. 아니, 되었었다. 이호는 텃밭을 보지 못하고 떠났다.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서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올블랙 정장이 잘 어울리고, 내 머리 끝이 그의 어깨 즈음 닿을만큼 거대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젠 나보다 그가 더 까매졌다.
"지금처럼 사는게 더 좋아보여. 종종 들를께."
"무리 하지 않아도 돼."
이호는 카페에서 나서기 전 명함을 건넸다. 'J 그룹 이사 최이호'. 그의 핸드폰 번호와 메일이 깔끔하게 프린트 되어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명함 뒷면을 발견했다.
'넌 이 번호로 연락해도 돼. 내 일기의 암호를 맞춘 유일한 사람이니까.'
명함 앞면과 다른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호는 늘 내가 알지 못하는 새에 매년마다 빠짐없이 우편함 속 발신인이 없는 생일 편지와 오렌지 사탕을 두고 갔고, 나는 주에 한 번씩 텃밭 사진을 찍어 그의 번호로 전송했다. 그 누구도 서로에게 답장은 하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어떠한 의식처럼, 우리는 편지와 사진을 일방적으로 주는 행위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