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박

by 이헤윰

정은 무엇일까. 나는 반복과 의미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호가 매 년 반복해서 편지와 사탕을 주는 행위, 그리고 내가 반복해서 텃밭 사진을 이호에게 보내는 행위. 그 반복이 사라진다면,는 마치 몸 속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허전함을 느낄 것만 같았다. 과연 그도 같을까. 나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는 나에 대해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나 뿐 아니라 모두에게 그랬다. 늘 그랬다.


'세연에게

11살 생일을 축하해. 눈이 내릴 때에는 많이 오는데, 자주 오는 것은 아니어서 그런지, 네 생일 때 눈이 올 것을 가늠해 보는게 연례 행사가 되었어. 올해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눈이 내려서 다행이구나. 또 멧돼지가 내려올 수도 있을테고.

여름에 함께 먹었던 수박이 참 맛있는거 같아. 서리한 걸 몰래 먹어서 그런건가 싶기도 하고.. 아주 달았어. 씨앗이 잘 자랐다면 좋았을텐데, 그렇지?'


텃밭에서 씨앗은 수박이 되지 못하고, 자그마한 비료가 되어버린 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 씨앗을 심고, 물을 제 때 주면 잘 자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그래도 과거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씨앗을 심었을거다.


'난 사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 이건 너에게만, 처음으로 털어놓는거야. 누군가와 둘만 아는 비밀이 생기는건 꽤 재미있는 일이거든.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 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그래. 세연이도 나중 가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있다면 얘기해줘. 분명 넌 잘할 수 있을거야.'


두과자를 만들고 싶었다. 이것도 직업이 될 수 있을진 모르겠다. 이유는 단순했다. 호두과자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마음에 들었고,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얘길 들었다. 다른건 몰라도 머리가 좋다면 사는 데 꽤 편리한 점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얘기를 어른들이 들었다간 장래희망을 제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소리를 할게 뻔했다.


"난 재미있는거 같은데?"

"호두과자를 만드는 일이 반복노동이잖아. 난 거기에서 힐링도 느낄 수 있을거 같아."

"색다른 호두과자를 발명해봐. 혹시 모르지. 특허를 내서 유명해질지도 몰라."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은데.."

"호두과자 장인이 되는거잖아."

"그건 되고 싶어."


호두과자 장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호두과자와 장인 두 단어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 때부터 이호와 만나면 호두과자에 대해 알아보고, 호두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호두과자 장인이 되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등 여러가지 준비를 했다. 마치 첩보작전을 벌이는 것처럼, 비밀스럽게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희수는 모두 알아챘으나 부러 모른 척 해준 것 같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적당히 모르는 척 해줄 수 있는 사람.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말하지 않는 사람. 그러나 필요할 때에는 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 나는 희수와 같은 호두과자 장인이 되겠다 다짐했다.


수 받을만 한 인생은 분명 아니다. 청년 실업자, 기물 파손 혐의가 있는 사람,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온 실패자. 열한 살의 소녀가 꾸었던 호두과자 장인은 빛바랜 추억이 되었고, 호두과자 일지도 빈 집, 빈 방 속 책장 구석에 꽂혀 있다. 그곳에 이호는 없다. 희수도 없다. 세연은 이호의 책을 들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오래된 친구에게 소감을 전한다. 식탁 맞은 편에 앉혀진 아이보리 색의 강아지 모양 봉제인형이었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테오는 금빛 털이 아름다운 강아지였다. 이호도 그 부분을 자랑스러워했다. 이호도 아마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테오는 노견이 되어 여유롭게 이호의 곁을 지키고 있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호가 내게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안전거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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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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