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12일(금)
오늘 산행목적지는 아차산과 용마산. 그런데 지난 일기를 찾아보니 정확하게 1년전, 그러니까 지난해 5월12일에도 같은 곳엘 다녀왔었다. 일부러 날짜를 맞추려고 한 것도 아닌데, 우연치고는 신기하다.
가까운 곳이긴 해도 산에 가는 날 일찍 일어나는 건 마찬가지다. 6시에 일어나 아침을 챙겨먹고 개롱역으로 나가니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앉을 자리가 있다. 그래 봐야 광나루역까지는 15분도 걸리지 않는다.
광나루역 1번 출구로 나가 아차산 방면으로 걷는데 이른 시간인데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골목을 지나는데, 지난해에 있던 벽화들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른 걸 설치해 놨는데, 보기엔 전만 못하다.
‘아차산 어울림 광장’으로 올라가는 왼쪽길이 공사 중이다. 분수도 있고 경치도 좋아서 좀 돌아가더라고 그 길로 가려고 했는데, 길이 막혀있다. 안내판에는 공사기간이 4월30일이라고 쓰여있는데, 언제까지 막아놓을 건지 모르겠다. 암튼, 어쩔 수 없이 오른쪽 나무데크 길을 따라 올라갔다.
아직은 사람들이 없으니 사진 찍기에 좋다. ‘아차산 어울림 광장’ 표지판 사진을 한장 찍은 다음 ‘아차산 동행숲길’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여기서도 오른쪽으로 가면 좀더 편하긴 해도 걷기 위해 나온 길이니 땀 좀 흘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오른쪽에 세워둔 안내문에서 <아차산의 역사유적>을 보게 됐는데, 내용은 이렇다.
“아차산(295.7m)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남쪽으로 한강이남, 북쪽으로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 같은 입지적 조건으로 삼국시대에 치열한 격전지가 됐으며, 아차산성과 아차산일대 보루군은 아차산이 갖고 있는 역사적 중요성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아차산성은 아차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 중앙부에 위치한다. 백제 책계왕 원년(286) 고구려를 대비하기 위해 수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백제가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이곳에서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의해 처형당하고,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1997년부터 2018년까지 진행된 부분적인 발굴조사 결과 축조방식과 유물을 통해 신라가 쌓은 ‘북한산성’임이 확인됐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고구려가 475년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후 한강유역으로의 진출로 확보와 한강 이남지역 공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에 쌓은 군사시설이다. 보루는 둘레 100~300m 내외 작은 규모의 성곽을 이르는 말로, 10~100여명의 소규모 부대를 주둔시킬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아차산 일원에서 20여개 고구려 보루가 확인됐고 이중 17개소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조금 오르다 보니 아차산성에 대한 보다 상세한 안내판이 보인다.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아차산 이곳저곳에 설치돼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아차산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돼있는 아단성(阿旦城) 또는 아차성 (峨嵯城)이다. <삼국사기>에 이 성을 286년(백제 책계왕 원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396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 성을 빼앗았으며, 475년에는 백제 개로왕이 이성 아래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과 1999년 성벽과 성 내부에 대한 조사가 부분적으로 이뤄졌다. 아차산성은 부정 육각형 포곡식(包谷式,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 산성으로 둘레는 1km가 조금 넘는다. 성벽은 높이 7m 정도로 추정되는데 안팎 모두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성벽 바깥쪽 기저부(基底部)는 별도의 보강성벽을 쌓은 후 흙으로 다져서 덮었다. 해발 203m 북쪽 모서리 가장 높은 곳에는 장대(將臺)가 설치돼있고, 동서남쪽에 문지(門祉) 가 남아있다.
계단상 지형을 이루고 있는 성 내부에서 여러 기의 건물터와 연못우물 배수가 등이 확인됐다. 기록에 따르면 아차산성은 백제가 수도 한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지만 나중에 고구려와 신라가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과 시설물들은 7세기 이후 신라가 축조한 것이다.”
계단을 따라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니 이번에는 아차산 보루군(阿且山 堡壘群)에 대한 상세한 설명문이 세워져 있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기록들인데 이제서야 자세히 보게 됐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아차산 줄기는 용마산과 망우산으로 연결돼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전체를 아차산이라 했다. 아차산 능선에는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堡壘)라고 불리는 성곽이 있다. 보루는 흔히 300m 이하의 작은 성곽을 가리키는데, 군사적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하는 일반성곽과 달리 주로 교통로나 요충지를 감시하는 기능을 했다. 몇 개의 보루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위치한 것이 특징이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들은 장수왕 63년(475) 고구려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후 만들어져 양원왕 7년(551)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 밀려 물러날 때까지 사용됐다. 삼국시대 한강유역은 인구와 물자가 풍부하고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백제신라 모두 중요하게 여겼다. 아차산 보루군은 한강유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고 동쪽으로 왕숙천, 서쪽으로 중랑천 변의 남북 교통로를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있다.
아차산에 흩어져있는 20여개 보루 중 아차산3보루아차산4보루 시루봉보루홍련봉1보루홍련봉2보루용마산2보루를 발굴조사 한 결과, 고구려 보루는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깊게 박아 판축공법으로 성벽 안쪽 토축부를 먼저 만들고, 돌을 덧대 외벽을 석축으로 마감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백제나 신라가야성곽과 다른 독특한 공법이다. ‘토심석축공법(土芯石築工法)’으로 불리는 이 공법을 통해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해 효율성과 경제성을 높인 고구려의 발달된 토목기술을 알 수 있다.”
갈림길에서 오랜만에 오른쪽의 ‘범굴사’ 방향으로 갔다. 오른쪽의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걷기 편하긴 하지만 오늘은 범굴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긴 범굴사를 지나면 다시 가파른 바위를 올라야 해서 마냥 쉬운 길은 아니다.
08시04분, 범굴사에 도착했다. 산비탈에 세워진 조그만 사찰이다. 그렇지만 여기저기 세워둔 설명문을 보면 사연이 많은 곳이다. 먼저, 검은 대리석에 음각으로 새겨 바위 안에 묻어놓은 <峨嵯山 大聖庵 事蹟碑>의 내용은 이렇다(2004년).
“峨嵯山은 서울 近郊에서 道峰三角淸溪冠岳 等과 나란히 있는 名山이다. 이 산은 예부터 阿且山城(또는 온달산성) 등이 있어 三國爭覇의 要地로서 漢江을 굽어보고 百濟舊都風納土城과 南漢山城 等을 (아달산성 一名 온달산성을 앞에 둔 현 워커힐 뒷편 뾰족산이 아달산성터다) 마주보는 事蹟과 名勝을 겸한 곳이다. 이 산에는 百濟 때부터 많은 寺刹이 있었음을 주위에 殘存한 石塔 등이 이를 證明한다. 그러나 寺名조차 알 길이 없으며 <東國輿地勝覽>에 銀石寺와 梵窟寺의 名稱이 나오지만 오늘날 銀石寺는 그 所在地를 알 수 없다. 現在로는 오직 梵窟寺였던 大聖庵이 있다. 이 寺庵은 新羅 文武王 때 義湘大師 創建이며 朝鮮 初에는 武學大師 重建이라 하나 文獻的 憑據를 찾기 어렵다. 己未年 獨立萬歲 後(1921년경) 故 安寶光 和尙이 觀世音菩薩 祈禱 後 現夢을 얻어 이 산을 찾아와 (석굴을 발견하고 굴 뒷편에 범굴사 옛터 岩刻文을 보고) 이곳에 法堂 및 寮舍를 再建하고 觀音大聖의 啓示를 받았다 하여 寺名을 大聖庵으로 改稱하였다. 法堂 뒷편 岩天井에 岩穴이 있으니 傳說에 義湘大師 修道時 天供米가 나온 구멍이라 하여 米岩이라 부르며, 米岩 아래 天然으로 된 돌확에 물이 나와 寺用水로 利用된다. 1950年 6.25動亂 때 兵火로 寺宇가 全破된 것을 故 安寶光 和尙의 弟子인 故 金石河 和尙이 師母인 故 李光明心 菩薩과 함께 全寺宇를 再建했으며 1968年 三聖閣을 追加 新築했다. 1978年 寮舍가 燒失된 것을 住持 故 安德庵 和尙과 敎任 安東俊 師와 李太雄 師가 諸家佛子들의 뒷받침으로 梵鍾佛事를 비롯, 寮舍 및 大雄殿을 改築하여 大聖庵은 寺刹의 規模를 갖춰 위로는 義湘武學 등의 오랜 傳統을 이어 받으면서, 寶光石河 德庵東俊 師 等이 守護와 發展을 거듭하여 오던 중 不幸히도 1992年 1월16일 1시30분경 원인 모를 火魔에 종각을 제외한 전가람이 完全 소실되는 참화가 있었다. 失意에서 再起, 卽時 再建創을 주선하여 于先 寮舍를 신축하고 이듬해인 1993년 3월 大雄殿을 諸佛子들의 정성 어린 施主와 願力에 힘입어 新築했고 그 다음해에는 三聖閣을 新築하고 丹靑佛事를 하여 道場을 옛 聖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옆에 따로 세워놓은 <大聖庵 沿革>도 위의 내용을 축약해서 철판에 새겨놓았는데(1996년), 세월이 지나면서 검은 잉크가 떨어져나가 보기에 불편했다. 대웅전 문을 활짝 열어놓았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2006년부터 ‘대성암’을 ‘범굴사’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데, 등산로 곳곳에 세워진 이정표에 아직은 두 명칭이 혼재돼 있었다.
범굴사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가파른 산길이 이어지고 이어서 경사진 암반이 나타난다. 그 암반을 올라 왼쪽 숲길로 가면 드디어 아차산 등산로를 다시 만난다. 그곳에는 각 보루에 대한 상세한 설명문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아차산 정상’에 도착했다. 조금 올라오긴 했지만 능선으로 이어진 길이라 표지판을 보지 않으면 딱히 정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나마 이 표지판도 최근에 세워놓은 것이다. 하긴, 나중에 멀리서 보니 정상 부근이 조금 봉긋하긴 했다. 이곳의 등산로는 서울 광진구와 경기 구리시의 경계지점이다.
08시45분, 아차산4보루에 도착했다. 다른 보루들과 달리 이곳은 전망이 탁 트여있어서 시원해 보인다. 아차산성 곳곳에 세워진 치(雉)가 여기에도 있는데, 그 옆에는 이에 대한 설명문도 함께 있었다.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성에서 치와 치 거리는 화살 유효사거리 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80m 정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고구려 보루에서는 치 사이 간격이 매우 좁다. 아차산 4보루에는 5개, 홍련봉 2보루에는 7개 정도로 치 수가 많다. 이는 치가 방어기능과 함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보강구조물 기능도 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계단을 내려가 용마산으로 향한다. 용마산까지 가려면 계단을 따라 한참 내려갔다가 그만큼 다시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능선을 따라 또 다시 오르내리길 반복해야 한다.
09시09분, 용마산(348m)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표지석 사진을 찍으려는데, 먼저 온 여자 둘이 찍으려고 하길래 양보하고 주위 사진을 몇 장(용마산 대삼각본점 등) 찍다가 표지석으로 다시 왔더니 여자 둘이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 정도쯤이야! 몇 장 찍어줬더니 이번에는 나도 찍어 주겠다 길래 핸드폰을 맡기고 가로 세로로 몇 장 찍었다.
정상에서의 할 일이 끝났으니 곧바로 내려와 운동기구들이 설치된 옆에 있는 나무벤치에 앉아 에너지바와 커피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이내 하산길.
경사가 급하니 내려가는 길도 조심해야 하지만 올라올 때보다는 한결 수월하다. 아직은 평일의 이른 시간이라 산에 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오랜만에 ‘해맞이 기념물’ 사진도 부담 없이 찍을 수 있었다. 이곳은 매년 새해에 해맞이 하는 행사를 여는 곳인데, 사람들이 많이 몰릴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이른 새벽에 나가야 해서 아직 참석해보진 않았다. 대신에 조금 늦게(6시쯤) 일어나 북한산을 오르는 것으로 새해맞이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산을 거의 내려온 곳에서 올라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아차산 유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옛날 삼청동에 점을 잘 친다는 사람이 있어서 임금이 그 사람을 불러들였다. ‘네가 점을 잘 친다고 하니 한번 쳐봐다’ 하고는 통 속에 쥐 한 마리를 감춰놓고 ‘이 인에 있는 쥐 한 마리가 몇 마리냐?’고 물었다. 이에 점쟁이는 세 마리가 들었다고 대답했다. ‘나쁜 놈!, 한 마리인데 세 마리가 들었다고 하니 이놈을 죽여버려라’라고 임금이 말했다. 여러 장정이 달려들어 점쟁이를 붙잡아 나간 후 임금이 이상해서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두 마리 있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을 급히 보내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죽이지 말라고 달려가면서 손을 들어 표시하는 것을 본 백정이 빨리 죽이란 것인 줄 알고 죽여버렸다. 그래서 ‘아차’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유래치곤 너무 황당하다. 전에도 그랬지만 등산로 곳곳에 세워져 있는 유래나 전설을 보면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들이 많다. 하물며 역사적 사실조차도 무시하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10시 정각, 고구려정(高句麗亭)에 도착했다. 옆에 세워놓은 설명문을 보니, 고구려 군사보루가 있던 곳에 1984년 콘크리트로 팔각정을 지었으나 노후화로 건물이 기울어, 2008년 철거하고 2009년 다시 지어 ‘고구려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아차산 초입으로 내려올수록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 무리로 많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많이 덥지도 않고 시원해서 산에 오르기 딱 좋은 계절인 것 같다.
또한, 초입에는 <아차산성의 한자(漢子) 표기>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아차산성의 한자표기는 보통 ‘峨嵯山城’으로 한다. 아차산성에 대한 가장 앞선 기록인 <광개토왕비>(414년)에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돼있다.
여기서 ‘阿旦’은 한자의 소리(音)를 빌어 표기한 것이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아차성(阿且城)’으로도 표기되면서 ‘阿旦’보다는 ‘阿且’가 자주 쓰였다.
‘단(旦)’과 ‘차(且)’가 금석문이나 판각인쇄에서 흔히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旦’ 자가 조선 태조의 나중 이름과 같기 때문에 피휘(避諱, 임금이나 조상의 이름자를 사용하지 않음) 해서 ‘且’로 썼다는 주장도 있지만, 피휘할 경우 같은 뜻의 다른 글자를 택하므로 피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고려시대 후기부터 본래의 ‘아차’에 뜻(訓)을 부여한 ‘峨嵯山(또는 峩嵯山)’이 쓰이면서 현재까지도 ‘峨嵯山城’으로 표기한다.
‘峨’와 ‘峩’는 모두 ‘산이 높다’는 뜻의 같은 글자며, ‘嵯’는 우뚝 솟다’란 뜻이다. 다만 아차산성의 경우 문화재청이 1973년 국가서적으로 지정 고시할 때 <삼국사기>를 근거로 ‘阿且山城’으로 표기하면서 공식 문화재 안내문 등에는 이를 따르고 있다.”
꽤 복잡하다. 그저 한자를 떼어놓고 ‘아차산’으로만 써야겠다. 아무튼, 아차산 산행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즐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