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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 제1일, 소나무숲길~ 평창마을

by 이흥재

2024년 4월16일(화) 비, 그리고 흐림


™ 1.소나무숲길~ 2.순례길~ 3.흰구름길~ 4.솔샘길~ 5.명상길~ 6.평창마을길


오늘부터 북한산둘레길을 걷기 위해 이른 아침밥을 챙겨먹고 밖으로 나갔는데, 어! 비가 온다. 급하게 일기예보 앱을 열어봤지만 비 소식은 없다. 어떻게 된 거지? 다른 동네를 검색해보니 오전 9시까지 비가 온다고 예보된 곳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큰 비는 아니었다. 산 정상에 가는 거였으면 우중산행(雨中山行)이 위험할 수도 있어서 포기했겠지만, 둘레길을 걷는 거라서 출발하기로 했다. 아마도 몇 시간 후엔 비가 그칠 거란 기대감도 있었다.


국립공원공단에서 운영하는 북한산둘레길은 21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고, 총거리는 71.5km다. 몇 번에 나눠서 걸어야 할까? 4번으로 나누면 하루에 걷는 거리가 조금 길고, 5번이면 좀 짧은 편이다. 그래서 4번에 나눠 걷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그러면 3번은 하루에 20km 가까이 걸어야 하고, 마지막 날엔 15km쯤 걸으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 21구간(우이령길)은 사전에 예약해야 갈 수 있는 길이다.


아침 7시45분쯤 북한산우이역 2번 출구로 나가 걷기 시작하려는데 역시 비가 내린다. 우산을 받쳐 들고 조금 가니, 1구간 소나무숲길과 21구간 우이령길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보인다. 오늘은 첫날이니 소나무숲길을 향해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산뫼마을’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이 마을은 수도서울의 진산(진산)인 북한산의 관문마을이며, 우이동 175번지 일원에 자리한다. 북한산 옛 이름인 삼각산의 유래가 된 백운대,인수봉,만경봉 세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보이고, 북한산에서 발원한 청정수 백운천이 감아 도는 마을이다.”


우이동(牛耳洞)에 대한 소개글도 보인다. “북한산이 누워있는 소와 같고, 백운대와 인수봉•만경대가 소뿔과 같아서 삼각(三角)이라 했으며, 뿔 아래 귀가 있으니 ‘소의 귀(牛耳)’란 이름이 붙었다.”


계곡길을 10분쯤 걷다 왼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서 ‘우이동 만남의 광장’을 지나고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에 도착했다. 스탬프투어 패스포트를 사기 위해서였다. 문은 열려있는데, 자원봉사자가 청소하고 있고 직원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 기다리니 직원이 들어오면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한숨 돌리고 나더니 패스포트를 건네준다. 가격은 3천원이다.


우이분소에서 나왔는데도 비는 계속 내린다. 우산을 쓰고 손병희 묘소가 있는 샛길로 들어간다. “이곳은 천도교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의 묘소다”라고 시작하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세워놓은 안내문이 보인다. 그는 1861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으며, 1922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여기는(1구간) 소나무숲길 구간입니다’란 간판이 붙어있는 출입문이 보인다. 바닥에는 야자매트가 깔려있고, 그 위로 벚꽃이 많이 떨어져 있다. 비가 와서 조금 우중충하긴 해도 걷긴 편하다. 숲길을 지나는데, 비에 젖은 초록색 새잎들이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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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를 지나는데 ‘음용부적합’ 팻말이 붙어있다. 그런데도 옆에는 조그만 플라스틱 바가지가 몇 개 걸려있다. 하지만 샘물입구는 닫혀있다. 어떻든 먹을 수 없으니 그냥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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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밭공원과 국립4.19묘지를 지나 보광사에 도착했다. 사찰주변에는 핑크빛 철쭉이 반은 피고, 나머진 꽃망울로 남아있지만 화려한 풍경을 연출한다. 보광사 안내문을 보니,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788년 금강산에서 수도한 원담스님이 창건해 ‘신원사’라 했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됐던 것을 정일스님이 1979년 포교원을 세우고 1980년 11월 ‘보광사’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니까 대단한 사연이 있는 절은 아닌 것 같다.


보광사를 나와 둘레길을 이어가는데, 나무데크가 설치돼있다. 오랜 기억으로는 이곳 길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데크를 설치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조금 더 편리해진 길을 걸어간다.


걷다 보니 인상적인 문구가 눈에 띄었다. “평화로운 마을을 가져라. 그로써 다른 이들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다(First keep the peace within yourself, then you can also bring peace to others).” 네덜란드 사람 토머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가 한 말이라고 한다.


2구간(순례길) 종점인 이준열사 묘역과 3구간(흰구름길)이 시작되는 통일교육원을 지난다. 이 근방에 애국지사 묘역이 많이 분포돼있다고 한다. 9시가 지나면서부터 비가 그치기 시작한다.


오늘도 연리지(連理枝) 소나무가 있는 곳을 지난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연리근(連理根) 형태다. 연리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중국 역사서에서 비롯됐으며, 모자사랑이 오늘날 남녀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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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세워놓은 안내문을 보니, “후한(後漢) 말 문인 채옹(蔡邕)은 효성이 지극했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간 옷을 벗지 못하고 간호하다가 병세가 약화되자 백일 동안 잠자리에 들지 않고 보살피다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그 후 채옹의 방 앞에 두 그루 나무 싹이 점점 자라 가지가 서로 붙어 성장하더니 결(理)이 이어져 마침내 한 그루가 됐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채옹의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와 자식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간절한 사랑을 노래한 백거이(白居易)의 대서사시 <장한가 (長恨歌)>가 나온 이후엔 사랑이야기가 회자됐다.” 이 이야기는 <후한서 (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실려있다고 한다.


09시51분, 화계사에 도착했다. 둘레길에서 조금 벗어나있긴 해도 그리 멀지 않으니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사월초파일(5월15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오색연등이 화려하다. 입구에 세워놓은 설명문을 보니, “화계사는 고려 광종 때 국사와 왕사를 지낸 법인탄문(法印坦文) 대사가 부허동에 창건한 보덕암을, 조선 중종 때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서평군 이요(西平君 李橈)와 협의해 화계동으로 옮겨 짓고 ‘화계사(華溪寺)’라 했다. 광해군 때 모두 불탔지만, 도월선사(道月禪師)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제14대 선조의 아버지) 가문의 시주를 받아 1619년 중창(重創)했다. 그 후 쇠락한 사찰을 고종 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시주를 받아 중수(重修)했으며, 흥선대원군 친필현판이 곳곳에 남아있다. 1933년에는 한글학자 이희승•최현배 등이 화계사 보화루에 숨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연구했다. 1960년대부터 해외 포교활동 한 숭산 행원선사(崇山 行願禪師)의 영향으로 외국인이 찾아와, 해외포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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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조금 지나 흰구름길 구간 중간에 있는 구름전망대에 올랐다. 멀리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들이 보여야 하는데, 안개가 많아서 가까운 능선과 건물들만 보인다. 바람이 부니 땀에 젖은 옷 때문에 한기(寒氣)를 느낀다. 서둘러 내려와 세번째 포토포인트(Photo Point) 사진을 찍고 둘레길을 계속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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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골공원지킴터를 지나 조그만 나무다리로 계곡을 건너간다. 다리 바로 옆에 세워놓은 ‘빨래골 유래’에 대한 설명문을 보니, “이곳 수유동은 예부터 북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 양이 많아 ‘무너미’라고 불렸다. 맑고 깨끗한 물이 넘쳐 당시 대궐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면서 ‘빨래골’이라고 했다.”


솔샘발원지를 지나면서 네번째 포토포인트 사진을 찍었다. 이 근처에 버스종점이 있어서 되돌아가도 되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계속 걷기로 했다. 버스종점을 앞에 두고 오른쪽 숲길로 접어든다.


솔샘마당을 지나는데 옆에 탁자가 있어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비가 온 후라 의자와 탁자가 모두 젖었다. 아쉬운 대로 휴지로 의자를 닦고 배낭에서 햄버거와 포도, 커피를 꺼내놓고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엉덩이가 자꾸만 젖어오는 것 같아 일어나서 식사를 마무리했다. 앉아 있으니 또 추워진다.


북한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를 지나 5구간인 명상길로 올라간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한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지만, 오늘은 목적지가 다르니 가던 길을 재촉한다. 수많은 계단을 올라 11시55분, 형제봉입구에 도착했다. 형제봉과 둘레길이 갈라지는 길이다. 이정표를 보니 형제봉까지는 950m라지만 내가 갈 길은 아니다.


명상길 구간이 끝나고 오늘의 마지막 구간인 평창마을길이 시작되는 곳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올라갈 때 계단이 불편한 것 같지만, 경사가 아주 심한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계단이 편하다는 것 알게 된다. 경사로를 오르다 보면 발목에 힘이 아주 많아 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길을 걷다가 어디서부턴가 코스를 놓쳤다. 아무리 가도 둘레길 표시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지? 그때서야 지도를 꺼내보니 ‘보각사’ 근처다. 안내문을 보면 여섯번째 포토포인트가 보각사 위쪽에 있다고 했었는데, 바로 그 절이다. 그런데 윗길로 올라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야 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힘들어도 오르는 수밖에. 계단 중간에 보각사 정문이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올라갔는데, 포토포인트를 찾을 수 없다. 어디 있는 거야? 혹시 몰라서 둘레길을 되돌아갔더니 청련사(靑蓮寺)가 나왔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궁금해서 국립공원 사무실로 전화했지만 점심시간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멘트가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보각사 쪽으로 다시 걸어가고 있는데, 잠시 후에 포트포인트가 보인다. 조금만 살펴보면 됐을 걸, 마음이 조급하니 몸이 고생한다.


주한 코트디부아르 대사관을 지났다. 관저 앞에 삼색 깃발이 나부끼는데 처음 보는 코트디부아르 국기일 거다.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가까이서 대사관저를 보는 건 처음이다. 다른 곳은 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거나 경찰들이 경비서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던데, 이곳은 아무런 시설도 따로 없다.


버스를 타기 위해 큰 길로 내려가다가 2014년 제32회 서울특별기 건축상 중 우수상 팻말이 벽에 붙어있는 집을 지난다. 옥호(屋號)는 ‘시간이 쌓여가는 집’이다. 하지만 담과 나무 때문에 주택을 자세히 볼 순 없었다. 그래도 그런 사연이 있는 집을 처음 보는 거라서 신기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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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나왔다. 여기서 6구간 종점인 탕춘대성암문 입구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하지만,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길을 건너 버스를 타고 세종문화회관까지 가서 다시 지하철 5호선으로 갈아타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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