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9일(화) 맑음
오늘은 청계천 물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엔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는 살곶이공원에서 시작할까 했는데, 거리가 짧은 것 같아 좀더 하류로 내려가 중랑천이 한강과 만나는 두모포(豆毛浦)에서 걷기 시작하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3호선 옥수역 3번 출구로 나가 한강변으로 가야겠는데, 잠시 방향을 몰라 네이버 지도를 따라 옥수나들목으로 나갔더니 생각보다 빨리 한강변에 도착했다. 그곳이 ‘두모포’였다. 두모포는 두 물이 만나는 곳이란 뜻으로, 중랑천과 한강이 이곳에서 만난다고 해서 두물개, 곧 두못개가 됐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두모포가 됐다고 하며, 이는 옥수동의 옛이름이기도 하단다.
교각에 붙여놓은 설명문을 보니, “세종대왕은 1419년 왜구들의 약탈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마도 정벌을 계획하고 이곳 두모포에서 이종무 (李從茂 1360~1425)등 8명의 장수에게 출정명령을 내려 정벌을 승리로 이끌었다.”
상류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자전거길과 보행자도로가 잘 정비돼있다. 포장이 돼있어서 바닥이 딱딱하긴 하지만 걷기엔 편하지만, 오래 걷다 보면 발바닥이 따갑고 무릎이 시큰거릴 까봐 걱정스럽긴 하다. 살곶이 체육공원까지 3.6km란 이정표가 보인다.
그리고 이내, 한강의 사라진 섬 저자도(楮子島)가 있던 곳에 이른다.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있던 섬으로, 일명 ‘옥수동 섬’이라고도 했다는데, 1970년 압구정동에 택지를 조성하면서 이곳의 흙과 모래를 사용하는 바람에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강변에 세워놓은 설명문을 보니, “조선시대에는 서울 앞을 흐르는 한강만을 따로 경강(京江)이라 불렀는데, 두모포 일대는 경강 동쪽에 있어서 동호(東湖)라 했다. 한명회(韓明澮)가 저자도 남쪽 대안(對岸)에 압구정(鴨鷗亭)을 지었다.”
오래 전 신문(매일경제 2011.2.27)을 보니 서울시 등에서 저자도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지금도 한강이 흐르고 있는 걸 보면 계속 추진하기는 어려웠었나 보다. 저자도는 조선시대 촌락까지 있었지만 1925년 대홍수로 모래와 자갈이 쌓이면서 무인도가 됐는데, 면적이 118만m2였다고 한다.
중랑천이 청계천과 합쳐지는 곳부터 한강과 만나는 지점까지 3,279m는 철새보호구역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논병아리왜가리황조롱이때까치 등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청계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몇 종류의 새를 보긴 했지만 이름은 잘 모르겠다. ‘철새’니까 지금은 그 철이 아닐 수도 있겠다.
길 옆으로 여러 종류의 튤립을 심어놓았다. 흰색빨강색노란색핑크색 등 다양한 색깔의 튤립들이 있는데, 보기엔 좋아도 사진에 담으려니 보이는 것만큼 잘 찍을 수가 없다.
벚꽃나무로 가로수를 심어놓은 거리를 지난다. 벚꽃이 만개하다 못해 꽃잎이 눈처럼 떨어진다. 길가에는 눈송이처럼 꽃잎이 쌓여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 벚꽃 개화시기가 늦어져 ‘축제’를 망친 곳이 많다던데, 요즘이 제철인가 보다.
08시37분, 살곶이다리에 도착했다. 표지석을 보니 이 다리는 사적이면서 보물이다. 여러 문화재를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만큼 중요한 유적인가 보다. 설명문도 2개나 세워놓았다. 그중 내용이 간략한 곳을 보니, “살곶이다리는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도로에 만든 돌다리로, 동교 일대를 살곶이들(箭串坪전곶평)이라 해서 다리이름을 ‘살곶이다리’라고 했다. 평지를 걷는 듯해서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부른다. 세종2년(1420) 공사를 시작해 성종 14년(1483) 완성됐다. 1925년 대홍수와 한국전쟁으로 다리 일부가 손상된 것을 1970년대 보수했다. 조선전기에 만든 다리 중 가장 길다.”
그 옆에는 살곶이의 지명유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살곶이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 형성된 평야를 부르던 이름인데, 뚝섬이라고도 한다. ‘뚝섬’은 군대가 싸움터에 나갈 때 왕권을 상징하는 둑기(纛旗)를 세우고 승전을 기원하던 제사인 둑제(纛祭)를 지내던 섬이란 뜻이다. 야사에 태조가 왕자의 난 이후 고향 함흥으로 가버리자, 함흥차사 박순과 무학대사가 설득해 돌아오니 태종은 이곳에서 태조를 맞이했고, 이때 하륜이 태종에게 천막기둥 뒤에서 부왕께 절 하라고 조언했다. 조금 후 태조가 갑자기 태종에게 화살을 쐈지만 기둥에 맞았다. 이에 태조는 태종이 왕이 된 것은 천명이라 여기고 용서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은 ‘화살이 꽂힌 벌판’ 즉 ‘살곶이 벌’ 또는 ‘살곶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조금 억지스럽긴 하다.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는 살곶이다리를 따라 무심코 걸어가다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방향이 아닌 것 같아 되돌아와 청계천을 따라 올라갔다.
드디어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은 정비가 덜 된 것처럼 보인다. 수량도 많지 않다. 갈수기라서 그런가? 청계천 상류의 멋진 모습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시골 개울 같다. 오늘의 목적지인 청계광장까지 7.8km란 이정표가 보인다.
청계천에는 크고 작은 다리가 여럿 설치돼있는데, 처음 만나는 다리는 살곶이다리고, 두번째가 ‘제5세월교’다. ‘제1’부터 제4’까지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청계천을 따라 보행자도로가 설치돼있지만 군데군데 공사를 하면서 길을 막아놓아 자주 돌아가야 하는 구간이 있다. 한곳에는 ‘차집관로 단면보수 및 물막이공사’를 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무슨 공사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차집관로(遮集管路)’는 하수처리장까지의 관로하고 한다.
길가에 생뚱맞게 조그만 정자가 한 설치돼있다. 옆에는 ‘산엔 청’이란 표지석도 있다. 또 다른 표지석을 보니 청계천을 완공한 후인 2006년 9월 산청군수가 방문기념으로 세워놓았나 보다. 물론 지역홍보를 겸한 것이겠지만.
마장동을 지나는데, 화강석으로 만든 우상(牛像)이 서있다. 그리고 좀더 가니 보행자도로 양옆으로 높은 기둥을 세우고 청계천 주변에 있던 옛 건물들을 재현해놓았다. 건물이라고 해 봤자 판잣집이다. 자료를 보니 이 근처 어딘가에 판자촌을 재현해놓은 곳이 또 있다던데, 일부러 찾아가긴 힘들 것 같다.
두물다리를 지난다. 앙증맞은 사장교 형태다. 청계천 다리 중에는 평범한 것도 있지만 한껏 모양을 낸 다리들도 더러 있다. 공모를 했었나? 길 건너에는 ‘청혼의 벽’도 설치돼있다. ‘청계천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만드세요!’라고 써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다.
지나면서 보니 남해군과 제주에서 설치해놓은 것 같은 홍보물도 보인다. 남해군은 세모진 돌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남해군’이라 써놓았고, 제주는 물허벅을 지고 있는 여인상이다.
곳곳에 ‘우천 시 수문이 자동으로 열려 위험하니 대피하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저렇게 육중한 문이 열린다고? 어느 곳에는 아예 문처럼 보이지도 않는 것도 있다. 또한 어떤 곳에는 청계천 복원 후 최고수위가 표시돼있는데, 평상시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높이다. 아무튼 비가 올 때 청계천을 지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일 것 같다.
청계천 한가운데 ‘존치교각(하늘물터)’도 있다. 설명문을 보니,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면서 역사적 상징성과 청계천 복원의미를 부여하고자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 교각 3개를 존치했고, 2013년 7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소망의 벽’을 지났다. 한국민예주식회사에서 2005년 10월1일 설치한 것이라는데, 2만명의 꿈과 소망을 타일에 새겨 벽면에 가득 붙여놓았다. 너무 많아서 자기 것을 찾는 것도 쉽지 않겠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궁금해서 한번씩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긴 하다.
10시35분 수표교(水標橋)를 지난다. 이곳은 1420년(세종2) 다리를 놓고, 마전 (馬廛)이 있어 마전교라고 불리다 1441년(세종23) 다리 옆에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했다. 수표교는 원래 석교(石橋)였는데, 그 원형은 1959년 청계천을 복개할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설치했다.
청계천에는 정조대왕능행반차도(正祖大王陵幸班次圖)가 있다. 정조가 1975년 윤2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모친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과 현륭원(顯隆園)을 다녀오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따르고 있다. 청계천에 설치한 벽화타일은 가로세로 30cm 타일 5,120장으로 폭이 2.4m, 길이는 무려 192m여서 세계 최대규모의 벽화타일로 기네스북에 등재했다고 한다.
그런데 반차도를 보고 오면서 아무리 찾아도 왕의 위치를 모르겠다. 그래서 가장 화려하게 보이는 곳을 골라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결국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왕의 모습은 절대로 그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찾았어야 했다.
집에 와서 찍어온 사진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는 자궁가교(慈宮駕轎), 정조가 탄 말은 좌마(座馬)였으며, 그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나와있었는데, 그냥 지나쳐온 게 못내 아쉽다. 그래도 뭣 모르고 찍은 사진에 ‘자궁가교’는 포함돼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청계광장 쪽에서 두번째 다리인 광통교까지 왔다. 조선시대 광통방 (廣通坊)이 있던 다리여서 대광통교(大廣通橋)라고 했다. 광통방은 조선초기 한성부의 남부 11방 중 하나로,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통하는 큰 길가에 있어서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이 다리에 놓여진 돌들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를 황화방(皇華坊, 한성부 서부 9방 중 하나)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면서 당초 썼던 것들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걸은 지 3시간 만에 마지막 다리인 모전교(毛廛橋)에 도착했다. 길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과일 파는 과전(果廛)을 을 모전(毛廛, 우전[隅廛]이라고도 했다)이라고 불렀는데, 이 다리그 그 부근에 있어서 모전교라고 했다고 한다.
모전교를 지나 청계광장으로 올라가는 곳에 시원한 물줄기를 흘려 보내는 조그만 폭포가 있다. 그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거나 서로 얘기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청계천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의 마지막 볼거리는 ‘Spring’이다. 스웨덴 출신 미국작가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2022)와 코샤 밴 브룽겐(Coosje van Bruggen 1942~ 2009) 부부의 공동작품이며, 인도양에 서식하는 다슬기 모습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높이는 20m, 지름은 6m, 무게는 9톤에 이른다. 당시 제작비 340만 달로는 KT에서 기부했다고 한다. 설치 당시부터 전문가들의 혹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런 상징물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논란은 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 파리의 유명한 에펠탑도 당시 유명인사들의 놀림감이었다고 하지 않나? 누군가는 그랬다. 전문가에게 혹평을 받을수록 길이 남을 수 있다고!
교보문고에 들러 산티아고 순례길에 갖고 갈 USB(128GB)와 충전기 코드를 사 갖고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