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1일(월)
어제는 알베르게 예약을 하지 않아 2층 침대에서 자긴 했지만, 오르내리는 것만 빼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주위사람들도 엊그제에 비해 조용해서 잠을 설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무슨 까닭인지 한밤중에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조금 시끄럽긴 했다.
아침에는 여느 때와 같이 5시반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는데, 그 시간에 일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또한 엊그제와 다른 점이다. 5시가 되기 전부터 부스럭거려서 일찍 잠에서 깨야 했었는데, 어제는 시간을 꽉 채워 잘 수 있었다.
준비를 끝내고 알베르게를 나와 가로등이 있는 시내를 벗어나면서 헤드랜턴을 착용했다. 숲길을 걷기엔 아직 좀 어두워서다. 그런데 그동안 충전해놓지 않아서 얼마 못 가 헤드랜턴 불이 꺼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 밝아오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나가는데, 밤새도록 가로등을 환하게 켜놓았다. 알베르게도 있다고 표시돼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보기엔 늘 보던 흔한 마을 같은데 왜 이렇게 불을 밝혀놓았는지 모르겠다. 마을 끝에는 조그만 예배당(Capela de Santo Antonio da Balsa)이 있었다.
조용한 산실(San Xil) 마을을 지나 포장도로를 걷고 있는데, 바람이 많이 분다. 길가 큰 나무들이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다. 멀리 앞산 중간에 구름이 드리웠다. 대개는 산봉우리에 구름이 있는데, 지금은 봉우리를 제쳐두고 산능선을 따라 구름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구름이 층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숲길로 접어드니 원시림 같은 나무들이 많다. 길바닥도 잔모래여서 걷기에 아주 편하다. 몬탄(Montán) 마을을 지나는데,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라서 그런지 바르는 없고, 24시간 운영한다는 벤딩머신(vending machine)만 버티고 서있다. 마을 끝에는 기부제로 운영하는 조그만 가게가 차려져 있다. 물건이라야 몇 가지 과일과 음료수, 조그만 빵 몇 개가 전부다. 먹거나 살 생각은 없고, 그 모양이 재미있어 사진만 찍고 나왔다.
몬탄을 지나면서 안개가 짙어진다. 전에 봤던 안개는 대부분 새벽에 생겼다가 날이 밝아오면서 없어지는데, 여기 안개는 늦게 생기기도 하고 대낮까지 안개가 끼어있기도 한다. 안개가 생기는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은 특이한 것이 많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1시간 정도 늦은 8시20분경, 핀틴(Pintín) 마을에 있는 바르에서 엠파나다와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여기까지 여러 마을을 지나왔지만, 바르가 있는 마을이 없었다. 바르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문화여서 그런지 웬만한 마을에는 대개 바르가 있는데, 농촌마을에는 그나마 없나 보다.
포장도로와 숲길을 번갈아 지나다 보니 9시쯤 저멀리 사리아(Sarria)가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아기아다(Aguiada) 마을과 산 마메데(San Mamede do Camiño) 마을을 지나지만 별다른 편의시설은 없다. 그런데, 길가에 무화과가 많이 달려있다. 크기도 꽤 크다. 호기심에 두어 개 따서 잘라봤더니 아직은 씨가 익지 않았지만 냄새는 제대로 난다.
사리아에 접어들어 사리아 카미노 친구들협회(Asociación de amigos do Camiño de Santiago na Comarca de Sarria) 앞을 지나는데, 여러 언어와 함께 한글로도 “여기 사무실에서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지금은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슈퍼마켓은 10시가 지났는데도 셔터만 반쯤 올려져 있고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기념품을 팔고 있는 어느 가게 앞에 산티아고까지 112km 남았다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거리표지석에는 114km라고 돼있다. 정확하게 어디부터 112km란 건지 모르겠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시내를 지나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Monasterio de la Magdalena)를 찾아간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봤던 곳이 아니다. 그래도 초행이니 물어 물어 찾아갔는데, 11시에 문을 연다고 쓰여있다. 15분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제 확인하기론 오후 1시에 문을 연다고 했는데! 11시가 되어 접수하려는데, 직원이 예약했느냐고 물었다. 어, 이것도 이상하다? 사리아의 많은 알베르게 중에서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곳이라서 이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예약이라니! 그래도 접수는 받아줬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큰 착각을 한 것이었다. 본래 가려던 곳은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Sarria)였는데, 어디부터 생각이 꼬였는지 모르겠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알베르게로 찾아 들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생각났다. 공립알베르게는 분명 시내에 있었는데! 그래도 일찍 접수하고 씻고 세탁기를 돌려서 말릴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스럽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가는데, 알베르게가 시내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한참 걸어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알베르게가 순례길상에 있다는 것이다. 내일은 어차피 이 길을 지나야만 한다.
식당(meson o tapas)에서 ‘오늘의 메뉴’를 주문하고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려는데, 누군가가 한국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렇다니까 자기는 생장부터 팜플로나까지는 걷고, 거기서 자전거를 빌려 여기까지 타고 왔단다. 산티아고까지 가는 거고, 오늘도 내가 묵었던 트리아카스텔라에서 출발했지만 점심을 먹고 20km쯤 더 갈 거라고 했다. 이런 곳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처음 보는 사이여도 할 얘기가 참 많다. 점심을 다 먹도록 얘기를 나누다 그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갔다.
저녁 먹을 걸 사기 위해 슈퍼마켓을 찾아가는데, 너무 먼 곳에 있어서 그런지 알려주는 게 신통치 않다. 그래도 방향은 알았으니 가면서 몇 번 더 물어본 후 간신히 슈퍼마켓(Frioz)을 찾을 수 있었다. 꽤 규모가 큰 슈퍼마켓이지만, 내가 살 건 많지 않다. 저녁에 먹을 즉석식품과 과일 정도가 전부다. 넓은 마켓을 한바퀴 돌면서 파에야와 납작복숭아 2개, 요구르트와 대추야자를 사서 다시 가파른 언덕을 올라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숙소 앞에는 단체로 온 학생들이 모여 식사하고 있었다. 잠은 이 알베르게에서 자는 것 같은데, 식사는 따로 주문했는지 봉고차 트렁크를 열고 배식하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주위에 흩어져 자유롭게 식사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인다.
오늘도 내일 묵을 포르토마린(Portomarín)의 알베르게 두 군데에 예약메일을 보내놨다. 이곳도 알베르게가 많지만 예약이 필요 없는 공립알베르게는 시내와 조금 떨어져있는 것 같고, 이메일로 예약할 수 있는 알베르게는 두 군데 뿐이었다.
저녁식사는 낮에 사다 놓은 파에야와 요구르트, 납작복숭아와 점심 먹으면서 챙겨온 바게트로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