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5일(금)
엊저녁엔 무슨 일인지 내 윗 침대를 사용하려던 순례자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밤새도록 흔들림 없이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2층으로 오르내리기 귀찮아서 1층 침대를 주로 사용하지만, 2층에 건장한 남자가 오르내릴 때나 잠자면서 뒤척일 때마다 침대가 들썩거려 잠을 깨곤 하기 때문에 이래저래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어제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긴, 1층을 쓰면 또 다른 단점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알베르게는 1층 침대를 너무 낮게 만들어놔서 침대에서 고개를 들고 앉아있을 수가 없어, 잠자는 시간 말고도 대부분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있어야 해서 매우 불편하다.
오늘아침에도 내 알람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떠날 채비 하는 순례자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한국인 모녀도 포함됐다. 그동안 여러 번 만나고 가벼운 얘기를 주고 받았지만 아직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모녀가 항상 붙어서 지내고 있으니 따로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반면에, 이직준비 중에 혼자 왔다는 미혼의 여자순례자와는 어제 오후 알베르게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나중엔 카톡도 주고받았는데, 정작 이름은 모르겠다. 처음 카톡을 연결할 때 영어로 된 이름이 뜬 걸 봤는데, 다 연결하고 보니 별명만 뜨고 이름은 없었다. 카톡에는 프로필 사진 한장 없어서 나중에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무슨 일로 연락할 일이라도 있을까?
오늘도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걸었는데, 30분만에 아르수아에 도착했다. 아르수아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였나? 그렇다면 어제 여기까지 와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 같은데! 하긴, 오늘 목적지가 오 페드로우소(O Pedrouzo)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르수아에사 출발한다면 너무 일찍 도착하게 되어 알베르게 문 여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니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여러 문두들을 써서 비닐코팅 해 건물벽면에 걸어놓은 곳에 이르렀는데, 맞은편 바르에 불이 들어와있어 들어가려고 보니 입구에 ‘닫힘’ 팻말을 걸어놓았다. 아르수아에 문 연 바르가 있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냥 왔었는데, 그 후로 아직 바르를 보지 못했다. 중간에 포장마차 같은 바르가 하나 있었지만, 화장실도 이용해야 해서 그곳마저 그냥 지나왔었다.
오전 7시 반쯤, 드디어 바르를 만나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여자순례자와 단체로 온 듯한 학생들이 모여 식사하고 있었다. 단체학생들은 얘기하느라 시끄럽고, 밖에 혼자 앉아 음식을 먹던 여자순례자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순례 중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심지어 어떤 이는 걸으면서도 담배를 피워댔다. 한국에서는 야외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잘 보지 못하는데!
단체학생들이 나보다 먼저 출발했지만 얼마 안가 내가 앞질러갔다. 순례하는 동안 여러 차례 순례하는 단체학생들을 만났는데, 누군가에게 들어보니 요즘이 학생들이 순례하는 시즌이라고 했다.
갈리시아지방 순례길을 걷다 보면 숲속에 길을 낸 것인지, 순례길을 따라 가로수를 심어놓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름드리 나무들이 순례길 양옆에 있어 그늘을 만들어주니 햇볕이 강한 날에도 뜨겁지 않게 걸을 수 있어 너무 좋다. 길옆에 숲이 있는 곳도 있고 가로수만 심어져 있는 곳도 있는데, 어느 곳이든 순례자를 위한 배려가 대단한 것 같다. 하진 순례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도 이용하긴 하겠지만, 고마울 수밖에 없다.
10시 반쯤 다시 바르에 들러 맥주를 한잔 마시는데, 바르 앞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많이 있다. 오늘은 대부분 나처럼 오 페드로우소에서 머물 텐데 알베르게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자일 수도 있다. 프랑스길에서는 공립알베르게를 제외하면 대부분 예약이 가능한데, 그중에는 번거롭기도 하고 수수료까지 내야 하는 booking.com을 통한 예약이 대부분이지만, 이메일로 예약할 수 있는 알베르게도 더러 있다. 아무튼, 예약자가 많아 정원이 차면 그 알베르게에는 들어갈 수 없고, 공립알베르게는 선착순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이래저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산타 이레네(Santa Irene) 마을 초입에서 단체학생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 재작년 북쪽길을 걸을 때도 그런 순례자들이 있었는데, 처음 오는 순례자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아무런 안내사항 없이 거리표지석이 2개 설치돼있고, 어느 곳으로 가도 된다고 해놓았으니까. 하긴 어느 방향으로 가든 순례길은 다시 만난다. 다만, 산타 이레네의 알베르게에서 묵을 순례자가 아니라면 굳이 왼쪽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나도 처음 왔을 때는 그걸 몰라서 산타 이레네 쪽으로 갔지만, 다음부터는 마을을 거치지 않고 똑바로 걷는다.
오 페드로우소로 들어가는 길도 두갈래다. 오 페드로우소에 머물게 아니라면 큰길(N-547, Avenida Lugo)을 건너 숲속으로 들어가면 되지만, 오 페드로우소에 머물 예정이면, 알베르게들이 이 큰길 양옆에 있기 때문에 큰길을 따라가는 게 좋다. 숲길을 따라가게 되면 알베르게를 찾아 다시 우회해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큰길로 부지런히 걸어 이틀 전에 예약메일을 보낸 알베르게(Albergue Porta de Santiago )에 10시41분 도착했다. 입구에는 인터넷에서 본 대로 오후 1시에 문을 연다고 쓰여있었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 우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는데, 식사는 오후 1시부터 가능하다고 해서 파이와 맥주로 간식을 먹으면서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런데, 알베르게 예약이 안돼있다. 예약이 다 찼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이메일을 보낸 그날 답장이 와있었는데, 왜 그동안 확인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틀 전부터 예약이 찼다면 그들은 언제 예약한 거야?
이제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봐야 한다. 지난번 트리아카스텔라에서처럼 알베르게마다 찾아다니면서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 귀찮아서 가장 손쉽게 선착순으로 받아주는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Arca )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음식을 서둘러 먹은 다음 배낭을 찾아 공립알베르게로 갔다. 그런데, 아직 문 열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도 접수를 기다리는 순례자들이 너무 많다. 단체로 온 학생들까지 있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이메일을 늦게 확인하는 바람에 공립알베르게에 늦게 도착해서 접수할 때까지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게 됐다. 하지만, 지금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알베르게는 예정된 오후 1시에 열렸지만, 접수 받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어제 리바디소 알베르게에서는 접수 받는 사람 말고 자원봉사자가 있어서 그들이 순례자들을 안내했는데, 여기는 혼자서 그 두 가지를 하고 있어서 더 바빠 보였다. 그런데 그보다고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접수하면서 보니, 여느 알베르게와 마찬가지로 여권 스캔하고 순례자여권에 도장을 찍은 후 방 번호를 알려주면 접수 끝이다.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앞에 순례자들이 많았다고 해도 3.분이면 끝났을 텐데, 내 순서까지 1시간 이상 걸렸으니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접수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긴 여기 사람들은 말하길 좋아해서 아무 때나 아무나 붙잡고 시간 보내는 걸 주자 봤다. 아마 오늘도 접수하면서 쓸데없는 잡담하느라 시간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내일은 산티아고의 호텔을 예약해 놓았으니 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긴 30일 이상 걷는 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다.
침대를 배정받고 2층으로 올라가니 단층침대가 남아있다. 여기는 한방에 단층침대와 2층 침대가 섞여있는데, 내 앞에 접수한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웬일로 단층침대가 남아있다니! 여기가 쓰기 불편한가? 그렇진 않는데! 아무튼, 운이 괜찮은 날인 것 같기도 하다.
짐을 정리하고 빨래까지 돌리고 나니 2시 반이 훌쩍 지났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식당으로 점심 먹으러 가기가 애매해서 마트에 들러 사다 놓은 간편음식과 납작복숭아, 요구르트로 점심을 먹었다. 대신 저녁에는 식당에 가서 먹어야겠다.
저녁 6시쯤 마을구경 겸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햇볕이 따갑다. 이럴 땐 선글라스라도 갖고 나왔어야 하는 건데, 항상 잊어버린다. 거리를 지나는데, 흰옷을 입은 한무리 남자들이 벌거벗은 남자를 십자가에 묶어서 끌고 다닌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당마다 멈춰 서서 여러 가지 퍼포먼스를 펼치면 식당손님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잠시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다가 식당(Cafeteria Che)으로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축구 때문에 난리다. 그래도 이 식당은 조용한 편이었다. 다른 식당에서는 아예 모든 손님이 중계하고 있는 TV를 향해 의자를 돌려놓고 응원하고 있었다. 이날은 4년마다 열리는 유럽컵(UEFA Euro 2024) 8강전(Quarter-finals) 중 하나인 스페인과 독일의 경기였는데, 전반전에는 득점이 없었고 후반전에 스페인이 한 골 넣으면서 리드하는 데까지만 봤다. 당연히 스페인 사람들은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다. 나도 골 들어가는 장면에서 소리를 질렀더니 나이 많은 손님이 외국인이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본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후 독일이 한 골을 넣었고, 연장전에서 스페인에 다시 한 골을 넣어 결국 2대1로 승리했다. 또한, 7월14일 치러진 영국과의 결승전에서 2대1로 이기면서 처음 개최된 1960년 이후 처음으로 4우승(1964, 2008, 2012, 2024)하는 나라가 됐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먹은 ‘오늘의 메뉴’는 최악이다. 샐러드가 형편없을 것 같아 수프를 주문하려니까 안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샐러드를 주문했는데, 역시 상추와 토마토 슬라이스 몇 조각, 그리고 그 위에 참치살을 올려놓은 게 전부다. 메인으로 나온 소고기도 너무 질겨서 먹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이렇게 질긴 건 처음이다. 부위 때문인지 굽기를 잘못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유튜브를 보고 자려는데, 9시가 지나도 밖이 훤하다. 하도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뒀다. 그때가 9시20분이었는데도 해가 지지 않았다. 낮이 긴 건지 시간책정이 잘못된 건지 알 수 없다. 하긴 갈리시아 지방에선 매일 아침 흐리고 비가 와서 잘 몰랐지만, 다른 곳에서는 7시에 해가 떴으니 어느 정도 정상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래도 낮 길이가 14시간이 넘는 거다. 아무튼,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