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17일 화요일 대체로 맑음
한양도성 인터넷 홈페이지(https://seoulcitywall.seoul.go.kr/)를 보면, 창의문에서 숙정문을 지나 혜화문에 이르는 ‘백악구간’에서 시작해 낙산과 흥인지문을 지나 광희문에 이르는 ‘낙산구간’, 남산을 지나 숭례문에 이르는 ‘남산(목멱산)구간’, 그리고 돈의문터와 인왕산을 지나 창의문에 이르는 ‘인왕산구간’ 순으로 순성(巡城) 안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완주인증서를 발급해주는 곳이 남산 아래 있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이기 때문에, 지난주에 숭례문에서 출발해 돈의문터와 인왕산 북악산숙정문을 지나 삼청공원까지 걷고, 오늘은 혜화문 맞은편에서 출발해 낙산과 흥인지문광희문을 지나고 남산을 거쳐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에 도착해 완주인증서를 발급받기로 했다.
먼저, 출발지로 가려면 집에서 가까운 개롱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환승한 後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가 창경궁로를 따라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곧바로 맞은편 언덕에 서있는 혜화문(惠化門)이 보인다.
혜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1396) 9월24일 기사를 보면, “동북은 홍화문이니 속칭 동소문이라 한다 (東北曰弘化門, 俗稱東小門.)”고 나온다. 그러다가 성종 14년(1483) 창경궁 (昌慶宮)을 새로 건설하면서 정문을 ‘홍화문’이라고 정했는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기존 홍화문의 이름을 혜화문으로 고쳤다. 그후 일제강점기인 1928년 문루가 헐리고 석문만 남았다가, 1939년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차길이 생기면서 그마저 헐렸는데, 1992년 지금 위치에 새로 지었다.
혜화문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난 나무데크 계단을 올라 낙산으로 향한다. 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양한 축성형태(築城形態)를 볼 수 있다. 한양도성은 태조 5년(1396) 축성된 後 3번 크게 고쳐 쌓았는데, 그때마다 축성기술의 발전에 따라 성돌모양이 달라졌다. 즉, 태조 때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했는데, 세종 4년(1422)에는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했다. 또한 숙종 30년(1704)에는 성돌크기를 40~45cm 방형으로 규격화해 성벽이 이전보다 견고해졌으며, 순조 원년(1800) 축조 때는 60cm 정방형으로 다듬어 쌓아 올렸다.
‘장수마을’을 지나 언덕을 올라 오늘의 첫번째 인증사진 장소에 도착했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어떻게든 셀프로 사진을 찍으려고 해도 얼굴만 크게 잡히고 뒷배경을 담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도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얼른 인증사진을 부탁했다.
흥인지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벽화로 유명해진 ‘이화마을’에 잠시 들렀는데 공사현장 말고는 마을이 조용하다. 예전 신문기사를 보면, 구경꾼들이 사진 찍으며 소란을 떨자 벽화를 없애버렸다고 했는데, 그 모습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꽤 많은 벽화들이 남아있었다.
흥인지문으로 가기 앞서 한양도성박물관에 잠시 들렀는데, 이른 시간이기도 하지만 1층 로비공사를 한다면서 문이 닫혀있었다. 대신에 입구 바닥에 새겨놓은 도성 축성관련 기록들을 보게 됐다. 먼저 <태조실록> 태조 9년(1396) 1월9일에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미리 성터를 측량해 자호를 나눠 정했는데, 백악 동쪽에서 천(天)자로 시작해 백악 서쪽으로 조(弔)자에서 그치게 했다(始築都城. 旣度城基, 分定字號, 始自白岳之東, 起天字, 終于白岳之西, 止弔字,)”는 내용이다.
다음은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2월23일에 “도성의 역사를 마쳤다. 성을 돌로 쌓았는데, 험지는 높이가 16척이요, 그 다음으로 높은 곳이 20척이요, 평지는 높이가 23척이었다(都城之役畢. 城皆以石築之, 險地高十六尺, 次地二十尺, 平地二十三尺.)” 라고 기록돼있다. 또한, <숙종실록> 숙종 30년(1704) 3월25일에는 “도성수축을 시작하기 앞서 삼각산에 고유제를 지냈다. 오군문에서 각각 장교를 보내 노원과 주암 등지에서 돌을 뜨게 했다 (始築都城. 先行告祭於三角山. 五軍門各遣將校, 浮石於蘆原舟巖等地.)”는 내용이 있다.
<승정원일기> 순조 1년(1801) 9월12일에는 “윤익열이 훈련도감의 말로써 ‘본국에서 맡고 있는 도성 창의문 서쪽 제6성랑 근처 체성 7칸 가량 무너진 곳은 이미 쌓기를 마쳤습니다’라고 아뢨다(尹益烈, 以訓鍊都監言啓曰, 本局分授都城彰義門西邊第六城廊近處體城七間許頹圮處, 今已畢築,)”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비변사등록> 숙종 36년(1710) 2월18일 기록에는 “훈련도감에서 ‘도성의 여장 수축공사를 3군문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도록 결정한 바 있다’고 아뢨다(訓鍊都監啓曰, 都城女墻修築之役, 令三軍門擧行事, 已有定奪,)”는 내용이 있다.
한양도성의 축성과 개축에 대한 시대별 주요 내용들을 새겨놓은 것 같다. 그런데, 글자들이 흐릿하고 빛에 반사돼서 내용을 제대로 읽어볼 수 없어 아쉬웠다. 다행히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들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흥인지문공원을 지나 흥인지문으로 가는 길 옆에 길게 새겨놓은 각자성석 (刻字城石)이 있었다. 다른 곳의 각자성석은 돌 하나에만 공사내용을 간략하게 새겨놓은 데 반해 이곳 각자성석을 여러 개를 죽 늘어놓았다. 태조와 세종 때는 전국 군현의 장정을 모아 성을 쌓았지만 숙종 때는 오군영 (五軍營)에서 축조했는데, 책임자를 명확하게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 전체 내용은 “訓局 策應兼督役將十人 使 韓弼榮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全守善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 都邊手 吳有善 一牌邊手 梁六吳 二牌邊手 黃承善 三牌邊手 金廷立 康熙 四十五年 四月日 改築”이며, 이를 해석하면, “훈련도감 관리인 한필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며, 1구간 석수는 양육오, 2구간은 황승선, 3구간은 김정립이 참여해 강희 45년(1706) 4월 고쳐 쌓았다”는 것이다. 위의 절충 (折衝)과 사과(司果)는 무관(武官) 직위로, 각각 정3품과 정6품 벼슬이다.
흥인지문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너려다 신호대기 시간이 지루해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는데, 승강장을 통과해야만 반대편으로 갈 수 있도록 돼있다. 다행히 지하철 무료카드가 있으니 안심하고 2번(들어가고 나가는) 카드를 체크하고 밖으로 나와 흥인지문 사진을 몇 장 찍고, 스마트폰 앱을 열어 이번 한양도성 순성길 마지막 스탬프를 받았다. 이제 잠시 後 남산에 올라가 인증사진을 찍으면 완주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흥인지문은 건립 당시(1396) 흥인문(興仁門) 속칭 동대문(東大門)이었는데, 언제부턴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도 불렸다. 즉, <세조실록> 세조 1년 (1455) 10월20일 기사에 “5사는 광화문 앞 길에 서는데, 많으면 종류와 흥인지문까지 이른다(五司立於光化門前路, 多則至于鍾樓興仁之門.)”고 돼있다. 여기서 ‘5사’는 문종(文宗) 때 개편한 군제(軍制)로, 용양사(龍驤司) 충무사(忠武司)의흥사(義興司)충좌사(忠佐司)호분사(虎賁司)를 말한다. 다만, 지금 걸려있는 ‘興仁之門’이란 편액은 고종 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음 행선지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다. DDP(동대문디자인프라자)가 있는 곳이다. 오른쪽으로 곧장 갈 수도 있지만, 오늘도 이간수문(二間水門)에 들러볼 요량으로 왼쪽으로 갔는데, 한창 공사중이어서 이간수문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막혀있다. 포기하고 계속 가다 보니 다른 곳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조금 우회해야 하지만 이간수문으로 갔다. 이곳은 특별한 곳도 아니고 처음 들러본 곳도 아니지만, 이곳을 지나면서 왠지 한번씩은 둘러봐야 할 것 같은 곳이다.
안내문을 보니, “이간수문은 조선초부터 남산 개울물(南小門洞川)을 도성 밖으로 흘려 보냈던 시설이다. 2칸 반원형으로 이뤄져 있어 이간수문이라 부른다. 배수시설 외에도 성곽 일부로 방어기능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 건립으로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2009년 DDP 건립을 추진하면서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다.”
오전 8시33분, 한양도성 4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光熙門1)에 도착했다. 이곳은 건립 당시부터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지금은 없어진 소의문(昭義門)처럼 시구문(屍軀門)으로도 불렸다. 도성안의 시신을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는데, 그 중에 천주교 순교자도 포함돼있어 성지(聖地)로 불리면서 ‘천주교 서울순례길 코스’ 24곳 중 하나가 됐다.
안내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본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고쳐 지었다.” 지금은 도로가 나있어 원래 자리에는 지을 수 없었다.
다산성곽길을 지나 장충단로를 건너 장충체육관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난 계단을 오른다. 이 길은 신라호텔을 우회하면서 반얀트리 호텔을 지나 국립극장에 이른다. 반얀트리 호텔은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의 설계로 1969년 개장한 ‘타워호텔’이었는데, 2006년 폐업하고 쌍용건설이 리뉴얼 공사를 한 後 2012년 현대그룹이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 남산으로 향한다. 오르막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가파른 나무데크 계단이 나타나는데, 누군가 분필 같은 걸로 표시해놨는데, 잠깐 끊어졌다 이어지는 계단 수가 모두 690개에 달했다. 지난해까지 2,917개의 롯데월드타워 수직마라톤에 참가한 경력으로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오늘처럼 더운 날씨에 오르려니 땀이 많이 난다.
계단을 오르다 중간쯤에 각자성석이 하나 있는데, “都廳監官 趙廷元 吳澤 尹商厚 邊首安二土里 己丑八月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즉, 숙종 35년(1709) 8월 도청개축 임시책임자인 조정원오택윤상후가 함께 공사를 감독했으며, 전문석수 안이토리가 공사에 참여했다는 내용이다.
남산으로 가다 보면 버스정류장 오른쪽에 남산팔영(南山八詠) 안내문이 있다. 조선 태종 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세조 때 漢城府尹으로 고침, 서울특별시장)를 지낸 정이오(鄭以五 1351~1434)가 남산의 8가지 경치와 조망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이를 ‘남산팔영’이라 하는데, 구름이 흘러가는 경복궁의 운치를 읊은 ①운횡북궐(雲橫北闕), 장마철 물이 넘쳐 흐르는 한강전경을 읊은 ②수창남강(水漲南江), 바위 틈에 피어있는 그윽한 꽃들을 읊은 ③암저유화(岩底幽花), 언덕 위 큰 소나무의 전경을 읊은 ④영상장송(嶺上長松), 봄날(음력 3월)의 남산 나들이를 읊은 ⑤삼춘답청(三春踏靑), 중양절(음력 9월9일)에 남산 오르기를 읊은 ⑥구일등고(九日登高), 초파일(음력 4월8일) 남산에 올라 연등 구경하기를 읊은 ⑦ 척헌관등(陟巘觀燈), 계곡에 갓끈을 씻는 선비들의 운치를 읊은 ⑧ 연계탁영(沿溪濯纓) 등이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卷三) 한성부(漢城府) 편에 실려있다.
이 가운데 버스정류장 옆은 일곱번째인 ‘척헌관등’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八日觀燈盛 4월8일 관등놀이 성대한데,
昇平第幾春 승평 세월 이 얼마인가.
萬龕明似晝 일만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四境靜無塵 사방이 고요하고 티끌 하나 없네.
虹焰蟠千丈 붉은 불길 천 길이나 서린 듯,
星芒拱北辰 별 광채 북두칠성[北辰]으로 향했네.
通宵看未足 밤을 새워도 구경 부족하여,
不覺到鷄晨 닭 우는 새벽에 이른 줄도 모른다네.
오전 9시41분, 서울의 25개 구 이름이 새겨진 서울중심점 마크가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공사차량이 가로막고 있어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전에 찍어놓은 게 있으니 그걸 활용하면 될 것 같다. 안내문은 보니, “서울은 조선 태조 3년(1394) 한양천도로 도읍지가 된 後, 행정구역 확장으로 한강 남북을 아우르게 되어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은 현 위치에 이르게 됐다. 이 표지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결정을 위한 측량 시발점인 대한민국 최초의 경위도 원점이었던 곳에 설치된 것으로, 국가기준점(서울25삼각점)과 지리적 삼각점으로서 측지와 지적측량에 쓰인다.”
그 옆에는 ‘남산’에 대한 안내문도 있는데, “본래 이름은 ‘경사스러운 일들을 끌어들인다’는 인경산(引慶山)이었지만, 조선초 태조가 남산 산신에게 목멱대왕(木覓大王)이란 벼슬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목멱산(木覓山)으로 봉했다. 그러나 한양 남쪽에 있는 주작(南朱雀)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남산(南山)으로 불리게 됐다.”
N서울타워 전망대 옆에는 남산팔영 중 첫번째인 운횡북궐(雲橫北闕) 안내문이 세워져 있는데, 그 전체내용은 이렇다.
玉葉橫金闕 옥빛 구름은 금빛 대궐에 비껴 있고
朱甍照碧天 붉은 지붕은 푸른 하늘에 빛나네.
丁東傳促漏 똑똑 급한 물시계 소리 들려오는데
戌北釀霏煙 북쪽에서는 안개가 뭉게뭉게 일어나네.
佳氣晴相擁 아름다운 기운 갠 날 서로 둘렀는데
高標望更連 높은 기상 바라보니 다시 잇따랐네.
南山將獻壽 남산 같은 높은 복을 우리 임금께 드리니
穆穆萬斯年 오래오래 만년을 누리소서.
N서울타워는 1969년 동양방송동아방송문화방송 등이 공동투자 해 1971년 완공한 후 종합전파탑으로 사용하다 1975년 전망대를 완성해 1980년부터 서울타워로 일반에게 공개됐다. 2000년에는 YTN이 인수한 後 리뉴얼 해 2005년 ‘N서울타워’로 개장했다. 해발 243m인 남산 위에 236.7m로 세워진 타워는 전체높이가 해발 480m에 달하며, 초속 56m의 강풍에도 안전하다고 한다.
남산 정상에는 곳곳에 수많은 ‘사랑의 자물쇠(lovelock)’가 걸려있다. 그 연원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다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05년 12월 N서울타워로 재개장 하고 1년 후인 2006년 12월6일 타워 루프테라스 끝단 펜스철망에 2개가 맞물린 자물쇠가 처음 확인됐다. 그리고 다음해 1월26일경 두번째 자물쇠가 확인된 이후 펜스철망 여기저기에 자물쇠들이 채워졌고, 8월초 ‘커플자물쇠’라고 칭해진 자물쇠 홍보광고가 펜스철망에 게시됐다. 2008년 2월 TV 프로그램에서 ‘남산자물쇠’가 처음 소개됐고, 4월 남산벚꽃축제 때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 자물쇠가 나날이 늘어났다.
2008년 6월15일,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 – 우리 결혼했어요> 방송에 5월26일 설치된 신애와 알렉스의 자물쇠 편이 방송된 後 남산을 찾는 방문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09년 3월 종영된 KBS2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금잔디 커플의 데이트 장면, 2014년 2월 종영된 SBS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인 천송이와 도민준 커플의 데이트신이 방영되는 등 각종 프로그램에서 즐겨 찾는 야외 촬영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이 세계 각국에 방영되고, 한국을 소개하는 관광가이드북에는 N서울타워와 더불어 자물쇠를 소개하고 있다. 2016년 서울 10대 한류명소로 선정돼 한국방문 관광객들에게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매김 돼 해외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오늘도 많은 내외국인들이 자물쇠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자물쇠를 걸기 위해 가게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녹슨 자물쇠가 환경오염을 일으킬 수 있다고 걱정하기도 하는데, N서울타워 주위에 먼저 걸었던 자물쇠들이 조금 변색되긴 했어도 아직은 그렇게 흉물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오래된 것을 제거하면서 새로 걸 수 있게 해놓지 않을까.
오늘 마지막 목적지는 인증사진을 찍어야 하는 목멱산 봉수대터다. 경봉수 (京烽燧)라고 했던 남산 봉수대는 모두 5곳에 있었는데, <세종실록>에 근거하면 현재 미군 통신부대 자리에 있던 제1봉수대는 함경도 경흥에서 아차산으로, 남산 2등 삼각점 일대에 있던 제2봉수대는 경상도 동래에서 광주 천림산으로, 현재 복원된 봉수대 자리에 있던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에서 내륙을 따라 무악동 안산 동봉으로, 케이블카정류장 아래 평탄지에 있었던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에서 해안을 따라 무악동 안산 서봉으로, 옛 남산식물원 일대에 있던 제5봉수대는 전라도 여수에서 개화산으로 전달하는 봉수를 받았다.
봉수는 모두 5가지 신호를 썼는데,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워 올렸다. 평상시에는 연기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적과 접전 중이면 다섯을 피워 올렸는데, 한줄기 흰 연기가 올라갈 때면 백성들은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5곳의 봉수대 중 유일하게 복원해놓은 제3봉수대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완주인증서를 받으러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안내센터로 간다. 직원 혼자 근무하고 있는 한적한 사무실에 들러 완주인증서를 신청하고 프린트 된 인증서를 들고 자랑스럽게 지하철을 타로 회현역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