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일 : 2025년11월19일 수요일 흐림
한라산을 가기로 처음 계획했던 건 9월말쯤이었다.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항공권까지 예매했는데, 입산금지 공고가 떴다. 등산로를 정비하기 위한 공사를 10월15일까지 하기 때문에 삼각봉대피소부터 정상까지는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도 성판악 탐방안내소에서 정상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계획은 관음사에서 출발해 정상을 찍고, 성판악 탐방안내소로 내려오려는 거였다. 오래 전이긴 해도 성판악에서 한번 올라가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른 코스를 택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10월말쯤으로 계획을 변경했는데, 얼마 後 공사기간이 10월말까지로 연장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때까지는 입산금지도 연장된다는 공고가 떴다.
하는 수없이 11월17일부터 19일까지 다녀오는 것은 결정하고 항공권 일정도 변경했는데, 열흘 전쯤 일기예보를 보니 하필이면 한라산을 오르려는 18일, 온종일 비가 올 거란 예보가 떴다. 잠시 오는 비라면 견디겠지만 하루 종일은 좀 힘들 것 같아 이틀 연기에 11월19일부터 21일까지 다녀오는 것으로 확정했다.
그런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18일 비가 올 거란 예보는 없어졌다. 그렇다고 날짜를 다시 바꿀 수도 없는 처지였다. 어쩔 수 없이 19일 제주도로 출발했는데, 오후에 제주공항에 내리니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숙소인 간드락게스트하우스로 가기 위해 181번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132번 버스도 같은 코스로 가는 거였는데, 그땐 미처 모르고 그냥 보내고 나니 한참 후에야 181번 버스가 와서, 제주여자중고등학교 정류장까지 갔다.
초행길인데 비까지 한두 방울 떨어지는 흐린 날씨 탓에 방향감각도 없어져 네이버 지도를 켜면서 숙소를 찾아갔다. 북카페를 겸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도미토리 형태의 방을 예약했지만 칸마다 커튼이 쳐져 있어서 개인공간은 보장돼있는 곳이었다. 가격도 2만원이 채 안됐다.
샤워부터 한 다음 가까운 곳으로 저녁을 먹으로 갔는데, 주문한 김치찌개가 너무 짰다. 밥 두 공기는 있어야 다 먹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과식할 수 없어 한 공기만으로 먹다 보니 찌개는 그만큼 남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면서 편의점에 들러, 혹시 비가 올지 몰라 우산을 하나 샀다. 그리고 그 우산은 이틀 동안 한번도 펴보지 못한 채 들고 다니다 나중에 택시기사한테 줘버리고 말았다.
숙소에 돌아오니 다른 사람들도 와있는데, 개인공간이 확보돼있는 데다 너무 조용해서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밤중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잠을 설치게 하긴 했다.
제2일 : 11월20일 목요일 흐림
전날 8시 조금 지나 잠들었는데, 밤중에 한번도 깨지 않고 새벽 5시에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8시간 넘게 푹 잔 셈이다. 아침으로 엊저녁에 사다 놓은 빵을 조금 먹고 밖으로 나와 카카오택시를 부르니 곧바로 달려왔다.
곧장 관음사지구 야영장까지 갔는데, 주위는 아직 어두웠다. 주차장을 지나 관음사지구 탐방지원센터로 가니 예약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 예약내용을 보여주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주위는 아직 어둡기 때문에 헤드랜턴은 필수였다. 산길은 바위투성이여서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올라가야만 했다.
새벽 6시30분, 해발 800m를 지나면서부터 18일 내렸다는 눈이 많이 보였다. 그래도 등산로엔 거의 녹아있어서 미끄럽진 않았다. 하지만 해발 1000m를 지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계단참마다 눈이 그대로 있어서 자칫 미끄러질까 조심하면서 한발씩 올라갔다.
안내판을 보니, 관음사에서 삼각봉대피소까지 6km, 정상까지 2.7km로 총 거리는 8.7km였다. 그렇게 가파른 길이 아닌데도 중간쯤부터 너무 힘들다. 하긴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다들 몇 발자국마다 쉬며 오르길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누가 더 인내하면서 오르느냐의 문제였다.
올라갈수록 눈은 더 많이 쌓여있었다. 해발 1200m를 지나면서부터는 온통 눈세상이다. 주위는 물론 등산로에도 눈이 수북이 쌓여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조금 지난 8시30분쯤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뚜렷하게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으로 본 푸른 봉우리는 더 보기 좋아 보였는데, 눈이 쌓여있으니 삼각형 모양만 뚜렷하게 보였다. 눈 쌓인 산도 좋지만 경치를 제대로 보려면 아무래도 가을이나 봄에 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피소에 들어가 쉬면서 간식도 먹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 아이젠도 착용했다. 눈이 많을 때는 아이젠이 큰 도움이 되진 않지만, 가끔 만나는 미끄러운 구간은 훨씬 안심이 된다. 그리고, 대피소에 10분쯤 머물다 다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눈은 점점 많아졌다. 엊그제 첫눈이 내린 거라는데 이정도 쌓인 걸 보면 엄청 많이 내렸었나 보다. 그러니 예정대로 18일에 한라산에 올랐다면 폭설을 맞으며 오를 뻔 했으니, 이래저래 늦춰진 게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용진각 현수교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주위가 안개로 자욱하다. 이젠 눈길 말고는 주위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계단에도 눈이 많이 쌓여있으니 경사로를 오르를 것 같다.
오전 10시13분, 백록담에 도착했다. 하지만 안개가 자욱해서 백록담은 보이지 않는다. 한라산 정상석 앞에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있어서 나도 그 뒤에 섰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인증사진을 몇 장 찍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기도 했지만, 바람도 많이 불고, 언제 안개가 걷힐지 몰라 그냥 하산하기도 했다.
성판악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정상에도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지금 올라오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리고, 1시간 좀 넘게 걸려 11시33분쯤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해 잠시 쉬면서 화장실도 다녀왔다.
대피소를 지나 조금 내려오니 안내판이 보이는데, 백록담에서 성판악까지 9.6km였다. 올라온 길이 8.7km였으니, 오늘 산행거리는 18.3km나 되는 셈이었다.
해발 1200m를 지나면서부터 산길에 눈이 녹아 진창이 됐다. 어느 곳은 아예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되도록 갓길을 걸으면서 피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낮12시39분, 정상에서 5.5km 내려온 속밭대피소에 도착했다. 이름이 특이하다. 안내문을 보니, “1970년대 이전까지 넓은 초원지대였으며, 인근주민들이 우마(牛馬)를 방목하며 마을목장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설명이 부족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삼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의 속(束)과 ‘밭’이 합쳐져 ‘속밭’이 됐다”고 한다. 아무튼, 삼나무와 관련 있는 곳인 것 같다.
해발 900m를 지나면서부터 눈이 없어졌다. 그래도 바닥에 돌이 많아 너무 딱딱해서 걷는 게 부담스럽다. 그리고, 정상을 출발한지 3시간 좀 더 걸린 오후 1시46분, 성판악 탐방안내센터에 도착했다. 한라산 등반인증서를 받을까 했는데 절차가 까다롭게 느껴져 포기하고 버스를 타러 갔다.
성판악 버스정류장에서 181번 버스를 탔다. 전날 제주에서 탔던 버스다. 그러니까 이 버스가 제주도를 한바퀴 도는 거였나 보다. 하지만, 이 버스를 숙소(돈내코힐리조트)까지 가지 않는다.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611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정류장에 내렸는데,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611번 버스가 언제 오는지 알 수 없다. 지도를 보니 정류장에서 숙소까지는 1.8km였다. 그냥 걷기로 했다. 그런데, 걸으면서 바로 후회했다. 평상시 같으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지금은 18km 넘게 산길을 걷고 왔으니 너무 피곤하다. 이럴 때 택시라도 불러야 했었지만, 그때는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30분 넘게 걸어 숙소 앞에 도착했는데, 입구를 모르겠다. 전화했더니 옆 건물로 오란다. 체크인 시간이 오후 3시부터라는데, 마침 그 시간이 되어 체크인 하고 숙소를 배정받았다. 방으로 들어가 샤워하고 조금 이른 저녁을 먹은 후에 저녁 9시도 되기 전에 잠이 들었다.
제3일 : 11월21일 금요일 흐리다 맑음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요기한 다음 5시 반쯤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이내 걷기 시작했다. 1차 목표지점인 돈내코 탐방안내소까지는 2.8km다. 찻길을 벗어나면서부터 주위가 어둡다. 오늘도 역시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걷고 있는데, 숲속의 바스락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그리고 하필 공동묘지를 지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 먹기 달렸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니 주위는 별로 신경 써지지 않았다.
1시간쯤 걸려 돈내코 탐방안내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있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갈래길에서 잠시 망설이다 어렵게 이정표를 발견하고 왼쪽길로 접어들었지만, 그 사람들은 여전히 탐방안내소 주위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정표에는 남벽분기점까지 7km로 돼있다.
산길을 오르면서 왼쪽을 돌아보니 서귀포 불빛이 보인다. 하지만 안개도 조금 있고 거리도 멀어서 흐릿하다.
첫번째 갈림길을 만났다. 왼쪽은 ‘수악길’, 오른쪽은 ‘동백길’. 뭔지 모르겠다. 네이버지도를 켜니 왼쪽으로 표시된다. 그 길을 따라 가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결국 가던 길을 되돌아 동백길 쪽으로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윗세오름’ 이정표가 보인다. 역시 맞는 길이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숙소에서 돈내코 탐방안내소까지도 그랬고, 지금도 줄곧 오르막 연속이다. 그리 심한 경사도 아닌데, 어제의 여독 때문인지 한발한발이 너무 힘들다. 몇 발자국마다 한번씩 쉬어가며 걷는데도 계속 힘들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오전 9시30분, 평궤대피소에 도착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평궤는 한라산 등산로에서 볼 수 있는 평평한 바위나 대피소, 또는 지형상 평평한 곳을 뜻하는 고유지명”이란다. 그럼 보통명사인가, 고유명사인가. 아무튼 평궤란 이름은 이곳에서만 본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 잠시 쉬면서 간식을 먹었다.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멀리 한라산 남벽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1.7km 더 가야 분기점에 도착한다. 역시 심하지 않은 경사로지만 한발한발이 힘든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남벽에 가까워지면서 눈길이 이어져 점점 더 힘들어진다.
남벽분기점을 300m쯤 남겨둔 지점에 누군가 ‘삼다수’ 생수를 많이 갖다 놓았다. 무슨 용도일까? 전부 2리터 페트병이라 건드릴 수도 없을 정도다. 이곳에 공사현장이라도 있는 걸까? 누가 장사하려고 그러나?
오전 10시23분, 남벽분기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윗세오름까지는 2.1km 더 가야 한다. 눈은 점점 많아지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려니 언제 미끄러질지 조마조마 하다. 하지만, 아이젠을 착용하기엔 애매해서 조심스럽게 걷기로 했다.
그리고, 11시24분 윗세오름(해발 1,700m)에 도착했다. ‘윗세오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이란 뜻으로, 붉은오름누운오름족은오름 등 세 봉우리가 나란히 이어져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데, 어느 오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정상석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대피소로 들어가 남은 간식을 모두 먹었다. 다른 사람들이 컵라면을 먹고 있길래 이곳에서 파는가 했더니, 아마도 각자가 가져온 것이었나 보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런대로 먹고 나니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다.
이제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를 보니 어리목 탐방안내소까지 4.7km, 그리고 버스정류장까지는 800m를 더 가야 했다. 그러니까 오늘 걷는 거리는 숙소에서 돈내코 탐방안내소까지 2.8km, 남벽분기점까지 7km, 윗세오름까지 2.1km, 그리고 어리목 탐방안내소를 지나 버스정류장까지 5.5km를 합하면 17.4km나 된다. 어제보단 조금 짧지만, 이틀 연속 걸으니 어제만큼 힘든 것 같다.
눈길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계속 올라온다. 대부분은 윗세오름이 목적지이겠지만 더러는 내가 온 역방향으로 돈내코까지 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윗세오름까지만 올라오면 다음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이니 갈 길이 좀 멀긴 해도 많이 힘들진 않을 테다.
오후 1시5분, 어리목 탐방안내소에 도착해 버스정류장 위치를 묻고 매점이 있느냐고 했더니, 없단다.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는데, 그 옆에 자판기가 있다. 이온음료를 한병 사고, 버스정류장으로 한참 내려갔다.
정류자에 도착하니 먼저 온 두 쌍이 앉아있다.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배낭만 내려놓고 잠시 쉬면서 가족들에게 산행을 무사히 마쳤노라는 문자를 보냈다. 버스는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한다.
10시53분에 도착하는 240번 버스를 타고 한라병원에 내렸다.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다음 버스를 타고나서도 제주공항까지는 한참 걸어가야 해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카카오택시를 부를까 했는데, 마침 개인택시가 오길래 곧바로 탔다. 엊그제 샀던 우산은 택시기사에게 줬다.
저녁 때도 아니었지만, 배가 고프니 우선 먹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육개장을 한 그릇 시켰는데, 역시 너무 짜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고 식당을 나와 보안검색을 받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 5시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약했었는데 무슨 일인지, 20분 지연된다고 했다. 결국 5시10분쯤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또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는 6시가 다 되어서야 제주공항을 출발해 김포공항에는 6시45분쯤 도착했지만, 거기서도 또 대기였다. 저녁 7시 지나 공항 밖으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8시 반이 지나 있었다.
힘들긴 했지만, 오래 벼르던 한라산을 다녀오고 나니 뿌듯하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하루하루를 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