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를 시작하기 전에
저녁 다섯 시.
분주했던 하루를 정리하고 이제 슬슬 작업이 마무리되는 시간.
일찍 퇴근하신 남편고객님이 무언가를 찾고 계신다.
'썰매' 라는데 우린 썰매를 본 기억이 없다. 아.. 불안하다.
"그거 내가 버리라고 했어요"
아내고객님이 다소 짜증 섞인 어조로 말씀하셨다.
"왜 그걸 버려!!! 다시 갖고 오라고 해!!!"
대략의 설명을 듣고 막내 선생님들이 급히 폐기물 집하장에 달려가서 다시 가져온 것은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은 나무판자였고 자세히 살펴보면 '썰매' 이긴 했다. 바스러지는 나무도 그렇지만 바닥에 붙은 썰매날은 검붉게 녹이 슬어서 썰매라고 알고 봐야 그런가 보다 하는 수준이었다.
사연인 즉 60대이신 남편고객님이 지금은 32세인 아들에게 처음 만들어 주셨던 썰매라고 했다.
베란다 창고 제일 바닥에 숨어있다가 집안 살림이 전부 다 나와보는 날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쐔 것이다.
버리지 않으시는 남편고객님의 성향을 낮 동안의 작업에서 조금 알 수는 있었다.
오래전 대학생 때 공부했던 의학서적이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못 보관이 되었었던지 페이지를 넘길 수 없게 들러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고 필기한 스프링 노트도 비슷한 보관 상태였지만 아내 고객님은 너무 싫어하시면서도 차마 버릴 수는 없다 하셨다. 남편이 난리가 날 거라고.
그러시면서 겨우 녹슨 썰매 하나 버리셨는데 결국 썰매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많은 집들을 정리하다 보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다.
가족사진, 아기탯줄, 학교앨범 이런 정도는 당연히 추억으로 분류될 품목들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유치원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들어 온 작품이란 이름의 자잘한 어떤 것들과 여행지에서 가져온 온갖 물건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추억이라는 이름 아래 몽땅 가지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만난다.
물론 오래되었다고, 지금 쓸모가 없다고, 낡았다고 다 버려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세월과 상관없이 잘 정돈되어 있어서 언제든 추억하고 싶을 땐 꺼내볼 수 있는 상태라면 굳이 논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가 만난 대개의 추억부자들의 물건은 어디에 두었는지 손쉽게 찾을 수 없을 만큼 마구잡이로 섞여있거나 박스 가득가득 십 여개가 되도록 그저 담아 쌓아두기만 해서 다시 꺼내 기억을 되살려 보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거나 세월앞에 속수무책 망가져 가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보관된 추억물품 때문에 정작 필요한 일상의 살림은 둘 곳이 부족해지니 결과적으로 집안이 어수선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추억물품 처리에 관해 추천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1. 아이들의 작품은 아이와 전시기간(보통 일주일)을 협의해서 정해놓고 기한이 지나면 사진 찍고 폐기
2. 액자형태로 된 사진은 다시 걸 계획이 확실히 없다면 액자는 버리고 사진만 파일에 넣어 보관
3. 의미는 있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낡아지거나 더 이상 사용계획이 없는 물품은 사진 찍고 배출
추억이 꼭 실물로 존재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실물은 창고 저 깊은 곳에 있어서 꺼내 보기도 쉽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낡아지겠지만 예를들어 사진으로 찍어둔다면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고 더 이상 상태가 변하지도 않는다.
몇 해 전 우리 집에서 피아노가 떠나던 날 나는 현관 앞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어두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집에 피아노를 둘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늘 '피아노가 있는 집'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았는데, 딸들의 피아노가 집으로 들어오던 날 느꼈던 행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르고 몇 년 동안 아무도 치지 않아서 결국 배출하기로 결정을 했지만 들어오던 날의 행복했던 기억은 사진과 함께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그리고 서두에 언급된 부부처럼 누군가의 과도한 추억물품 때문에 다른 가족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경우도 많이 본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과연 어떤 선택이 현명할지 고민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추억은 새록새록 살아나 현재를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거가 현재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다면 더 이상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