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y 이홍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현정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다. 누가 봐도 멀쩡해 보이진 않는다. 기껏 말하려고 했는데 다시 입을 다물게 된 현은 또한 현정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 눈빛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 마신 현정은 바락바락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왜 나를 쳐다봐요? 어르신이 걱정되면 직접 가보던가. 마을 어르신이라서 잘 모셔야 한다고 그렇게 입으로만 난리치면 뭐해요? 똥오줌 한 번 치워준 적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떠들면 누가 못해요? 그런 건 나도 잘할 수 있어요. 난 원래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었다고. 여기만 떠나면 잘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도 못하게 날 붙잡은 놈은 다른 년인지 놈인지랑 바람나서 혼자 떠나고, 나 혼자 여기 눌러앉게 됐잖아. 자식 새끼들 키워놨더니 연락 한 통 없고. 내가 지들 아빠 없을 때 얼마나 고생하면서 키웠는데... 그렇다고 내가, 어? 떳떳하게 연락할 처지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뭐하고 사는데! 돈 한 푼 못 받고 얼굴만 오래 봤지, 아는 거 하나 없는 노인네나 돌보고 있는데! 남들은 돈 받으면서 하는 일인데, 나는 그냥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하고 있잖아. 억울해 죽겠어, 아주! 마을 사람들끼리 술이나 좀 마셔야 추켜세워주고... 그것마저도 듣기 싫어가지고 당연한 일 하는 거 뭘 칭찬해주냐고 하셨죠? 이제 알아서 하세요. 나는 손 뗄 거니까. 어차피 연못도 저 모양이고, 이제 이 마을이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잖아? 어르신 아니었으면 나 진작에 서울 여자들한테 진작에 집 팔고 나갔어요. 이 마을에 태어나서 단 한 순간도 좋았던 적이 없어. 나처럼 불쌍하게 산 여자도 없을 거야. 그냥 둘째 언니 따라서 떠날 걸...”

버럭 내지르던 고함은 이내 한탄으로 이어진다. 이럴 때 서럽게 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마른 눈가를 연신 검지로 훑어댄다. 묻어나는 게 없으니 결국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시늉을 하기 시작한다.

정말 가지가지한다. 미윤은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밖으로 나올까봐 어금니를 꽉 깨문다. 그래, 현정의 신세가 처량하다는 거, 이 마을을 스쳐 간 사람도 다 알 거다. 저렇게 떠들고 다니는데 모를 수가 없기도 하고, 워낙 소문에 자주 오르락 내리락거리던 집안 사정이라서, 소문에 발이 달렸다면 서울까지 직접 뛰어갔을 거다.

자기가 말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 만나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참아온 거 조금 더 참고 죽을란다, 다음 생에나 잘 살겠지 하다가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냐, 당장이라도 떠나버릴 거다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가 말 불편하게 해야 하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불만도 애써 없는 척을 하는 이가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다. 연못 상태 때문에 다들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까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원치 않는 싸움에 휘말릴 뻔했다.

임순희 어르신은 단 한 번 소리를 지른 후, 조용해졌지만, 누구라도 가봐야 하는 건 사실이다. 현정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척하지만, 누가 대신 가줄 거라는 기대로 어깨가 들썩거린다. 현은은 모든 상황이 어지러운지 아예 이마를 감싸고 있다. 마을 남자들은 움직일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 사이에서 눈치 보는 건 영연이다. 현정은 얼굴에 철판 깔고 주저 앉기라도 하지, 영연은 그럴 용기조차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머뭇거리고 있어봤자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될 거란 사실도 잘 알 거다. 그간 이장의 아내로 치여 살았던 시간이 있으니까.

그들은 아마도 멀리서 온 나보단 자주 얼굴을 보며 지낸 영연을 더 닦달할 거다. 저 허옇게 뜬 얼굴. 분명 무슨 말이라도 들으면 제 발 저린 듯 연못에 저지른 일을 와다다 말할 게 뻔하다.

아마 현정도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머릿속이 아주 복잡하겠지. 어느 정도 눈치를 보다가 내 팔자 타령하며 못 이긴 척 일어날지, 도저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영연을 향해 시비를 걸지.

미윤이 보기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두면 압박감을 느껴서 줄줄 말할 게 분명하니까. 실제로 영연의 얼굴은 어제 먹은 아침까지 다 토해낼 정도로 질려 있다. 적어도 마을 사람들 앞에선 아내에게 큰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 희운이 힐끔거릴 정도다.

남편의 시선을 느꼈는지, 얇아서 잘 보이지 않는 속눈썹이 파들파들 거리도록 눈을 꽉 감았던 영연은 무릎을 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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