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고 일어난 일처럼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건물이 붕괴된 잔해 속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의 바람대로 되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가 내리는 9월이었나. 여러 해 동안 여러 만남의 종지부를 찍고 남은 것은 “이별은 참 쉽다”라는 것이었다. 하루는 퇴근을 하고 집에 가기 싫어서 정처 없이 걷다가 어느 한적한 카페에 가서 따듯한 카페 라테를 주문했다. 그러다 선물로 받았던 책 한 권이 생각나서 꺼내 읽었다. 박준 작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었다.
새로 맞은 아침, 힘겹게 들어오는 창의 빛을 보며, 조금 나아진 것 같은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을 맞았어야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몇 번이고 되뇌었어야 했는데.
박준, 환절기
오래도록 그리고 자주 마음이 이리저리 찢겨서 붉은 피가 생채기마다 흘러나오는 듯했다. 몇 년을 만났어도 뒤돌아서는 순간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었을 때, 그가 다른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미안하다며 오해라며 다시 잘해보자고 그의 입으로 내게 말했을 때,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나는 같은 말을 버릇처럼 늘 되뇌었고 또다시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제야 텅텅 비어있는 그야말로 빈껍데기만 남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사람에게서 받았던 상처를 다른 인연들로 보상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의심과 불안이 커져 이별의 횟수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러다, 가을이 지나갈 무렵에는 호된 감기에 걸렸다. 밤새 오한과 발열로 인해 땀을 흘리다가 가까스로 잠에 들었는데, 아침에 깨보니 몸이 이상하게도 전보다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번 크게 아프고 나니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남들에게 애써 괜찮은 모습을 보이지 말 것, 때론 아프지 않으려 노력하지 말고 온전히 아파 볼 것, 질기고 긴 밤을 보내더라도 지난 인연들에 대한 기억을 굳이 외면하지 말 것, 그해 환절기에는 뼛속까지 으스러지는 몸살과 맞바꾼 구원을 바랐다. 제발 스스로에게서 힘을 얻어 일어설 수 있게 해 달라고.
책, 박준 작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림, 기드온 루빈(Gideon Rub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