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기를
시어머니께서 다녀가셨다. 그리곤 며칠 동안 정신이 또 산란스러워졌다.
나름 분가를 했지만 어머니는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우리 집에 오셔서 2박 3일씩 계시다 간다. 그 횟수에 대해서도 볼멘소리를 하신다. 왜 우리 집에 못 오게 하냐고 말이다. 물론 어머니가 오셔서 육체적으로 덜 힘들긴 하다. 식사 준비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지니 말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정말 산란하다. 이런 심정을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주는 사랑에 익숙하신 분이다. 그 사랑이 너무 일방통행이셔서 때론 힘들게 느껴진다.
우리 집 텃밭도 혼자서 벌써 다 구상해 놓으셨다. 주인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냥 다 받아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아니야 여기서 내가 끊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항상 죄책감을 가지게 만든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내가 어떻게 했는데', 받는 사람의 심정은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 넘치는 사랑에 자식들의 목이 막히고 그 사랑이 소화가 되는지는 생각하지 않으시는 듯하다. 남편은 평생을 그 죄책감으로 살아왔다.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에 드리워진 그 무거운 짐, 죄책감을 아시는 걸까?
남편에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는 주기를 조정하고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어머니 댁으로 가자고 말이다. 나의 우유부단함과 상대를 배려한다고 했던 겉치레 말들이 그녀에게 잘못된 신호로 작용한 거 같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가족은 이게 필요하다. 너의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박완서 선생님의 모레알만한 진실이라도 라는 에세이를 이 구절때문에 읽었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신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이건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내 사랑이 내 아이에게 갚아야할 삶의 무게로 기억되지 않기를, 그래서 나도 매일 아이에게 딱 그만큼 사랑하리라 나에게 주문을 건다. 그런 절도를 갖추려고 매일 다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