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 위를 걷듯
삶은 불확실하고 실패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불확실성과 불안은 나를 지금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나는 그 답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난 주말, 나는 연달아 세 권의 책을 읽었다. 한 권은 이미 읽고 있었던 신경 끄기의 기술, 다른 한 권은 무례한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 마지막은 아비투스.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룬 책들이었지만, 읽고 나니 공통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예혜약동섭천(如履薄氷) -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언제나 나를 멈추게 만든다. 살얼음 위를 걷는 순간, 우리는 어떤 발걸음도 쉽게 내딛을 수 없다. 균형을 잃으면 바로 차가운 물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이 마치 살얼음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게 느껴질 때, 나는 이 말이 떠올랐다.천천히, 신중하게, 그리고 덜 단정하며 걸어가야 한다는 말로 나 자신을 다독인다.
1. [신경 끄기의 기술]에서 말하듯, 삶은 본래 불확실성 그 자체다. 우리는 매 순간 완전한 답을 알 수 없고, 그저 덜 틀린 선택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여기서 덜 틀린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살얼음 위를 조심스레 걷는 것과 같다. 내가 나를, 타인을 더 여유롭게 받아들이려면 조심스레 나의 확신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의 실패, 타인의 실패도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니까.
2. [아비투스]에서 저자는 '계급이 높은 사람일수록 느긋하며 여유가 있다'고 말한다. 왜일까? 그들은 남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문화적, 심리적 자본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 묘하게 와닿았다. 그저 자신이 충분히 괜찮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고 여유롭게 타인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3. [무례한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에서는 품위를 이렇게 정의한다. "품위란 우리 모두가 타인을 향한 책임이 있음을 지각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나 자신이 얼마나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타인을 밀쳐내고 경솔하게 굴었던 순간들이 많았는지 되돌아보았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나는 더욱 냉소적이었고, 타인의 실수를 비난하며 내 불안을 억누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도 더 초조해졌고, 타인의 향한 비난은 결국 내게 되돌아왔다.
삶은 살얼음처럼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이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거의 없다. 금강경의 일상무상분에서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나뉜 것이 없다"라고 한다. 나와 타인, 성공과 실패, 잘남과 못남 - 모든 구분은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자꾸 타인과 나를 구분하려 할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 증명하려 애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타인을 깎아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완벽한 이타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생활인이고, 나를 보호해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공격적일 수밖에 없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수 있다면, 아마도 조금 더 여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확신이 줄어든다고 해서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내 확신을 줄이기로 했다. 겨울의 살얼음 위를 건너듯 조심스럽게, 덜 단정(斷定)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적어도 이메일을 보낼 때, 내 어투가 너무 공격적이진 않은지, 지나치게 단정적이진 않은지 한 번 더 점검해 보자. 상대방이 불친절하게 느껴질 때, 그들도 어쩌면 나처럼 불안에 휩싸여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생은 본디 고통과 똥폭풍이 몰아치는 곳이다. 그걸 피할 순 없다. 하지만 그 위를 조금 더여유롭게 걸어갈 수 있는 연습은 해볼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