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의 마음
아이에게 옛날 만화 머털도사를 보여주다 새삼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에고의 발견.
머털도사 1화엔 머털도사가 어떻게 도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서사가 나온다. '어리숙하고 바보 같지만 착한 머털이'는 한량같이 보이지만 최고의 도력을 가진 누덕 도사의 제자 생활을 아니 노예 생활을 10년이 넘게 하고 있다. 그 와중에, 머리 좋고 똑똑하지만 야심으로 꽉 찬 꺽꿀이가 자기와 결이 비슷한 스스로 도력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그래서 그 도력으로 사람들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왕질악도사 밑에서 도력을 3개월 정도 하사 받아, 머털도사와 겨루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머털이는 누덕 도사에게 능력자 꺽꿀이를 이길 수 없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모든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누덕도사는 너는 꺽꿀이를 이길 거다, 하지만 이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태풍에 큰 나무는 꺾이지만, 결코 가냘픈 갈대는 절대 꺾지 못함을 보여주며 너는 아직 거꾸리를 이겨선 안된다고 한다. '강한 것은 그 강함에 못 이겨 부러지고, 유연함은 강한 흐름에도 적응한다.'라고 누덕도사는 머털이에게 가르치지만, 머털이는 순간 발견한 자신의 도력을 자랑하고 싶은 그리고 자기가 못나지 않았다는 자기의 에고 때문에 누덕도사의 조언을 거스르게 되어 처참한 결과를 겪게 된다.
에고의 마음
에고의 마음으로 보면 나는 한없이 잘난 사람이고,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며, 내 가정은 완벽해야 한다. 하지만 내 현실은 정말 이것과는 정반대이다. 에고의 마음으로 보면 나는 정말 희생적인 사람이며 남편은 내 힘듦을 무조건 알아줘야 하고 내 말을 다 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댁은 나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 내가 잘났다, 내가 xx 하다는 마음은 결국엔 남의 관점에서 어떠한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다. 머털이를 보면서 나를 봤다. 실은 나도 꽤나 에고가 강한 사람이었다. 인정한다.
몇 달간 길고양이에게 밥을 줘보고, 회사에서 배고프면 먹으려고 들고 온 견과류 몇 개도 창밖 까치에게도 던져 줘보고 있다. 누가 시켜서라기보다는 그냥 해봤다. 그러다, 보시의 행위가 실은 남의 슬픔을 헤아리기 위함이라는 문장을 접했다. 그래서일까? 조금씩 남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 '나'라는 그 협소한 공간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아주 조금씩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은 아니지만 말로는 남편에게 그래 그게 당신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일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모든 가사노동이 내 것이 되어야 할 때, 육체적 고통이 따라올 때, 자주 분노가 일어나긴 하지만 말이다. 가족들에 대해서도, 어쩌면 그들 역시 그냥 나에게 미안해서 말주변이 없어 내가 들었을 때 잠시 기분 나쁜 말을 했으리라, 나만큼이나 그들도 힘들겠지. 회사에서도 나에게 적의가 있어 그렇게 대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들 자신의 불안으로 그렇게 행동하려니 하고 내버려 두려는 연습...
물론 아직까지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슬픔이 다 보이고 그렇친 않다. 이 모든 연습에도 불구하고 '왜 나만'이라는 억울한 마음이 올라올 때가 더 많고 '내가 어떠하다'라는 과시적 마음이 올라오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조금씩만 변해보지 뭐. 사람이 갑자기 확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 하니, 그냥 조금씩이라도 상대를 바라보고 그들의 슬픔을 헤아려보기로 해본다.
페이융 '반야심경 마음공부'
보시란 남의 슬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남의 슬픔에 주의를 기울여라.
내 안의 소유욕과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져 마음의 평정심을 얻을 것이며, 냉혹한 인간관계가 따뜻하게 변할 것이다.
나를 둘러싼 현실을 외부의 힘으로 여기면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다가 오히려 자신이 바뀐다.
반면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현실을 변화시키게 된다.
조금씩 이렇게 하다보면 정말 냉혹한 내 인간관계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까? 온기가 전해져 올까 궁금하긴 하다. 그럼에도..훅하는 마음이 올라오는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