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와 혐오 그리고 분노의 시대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이지 다양한 시바새끼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무례와 혐오, 편 가르기. 그리고 그 모든 폭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요즘 읽고 있는 책, 셀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 이 책에도 1950년대의 미국의 타인종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나온다. 마치 그 차별이 너무나 정당한 듯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고, 그 폭력적인 시선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정당화되었다.
반세기 전 이야기지만,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우리는 여전히 성별, 인종, 직업, 계급으로 나누어 서로를 혐오하고 경멸한다. 심지어 직장에서조차 일부 개저씨들은 타인을 미스킴이라 부르며 이등시민처럼 대한다.
나는 남초 제조업 공장에서 일한다. 이곳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겪는 차별과 무례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한 개저씨는 파이낸스직을 '경비 부킹을 대신해 주는 미스킴'이라고 말했다. '아 이런 건 미스킴이 대신 입력해 주는데' 내가 남자였더라도 그런 개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무례할까? 왜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면 그 사람을 쉽게 깔아뭉개고, 모욕을 주고, 혐오의 시선을 던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과 동일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내가 그들에게 미스킴으로 보이는 한, 나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다. 그저, 잡일을 하는, 쉽게 대체 가능한 존재일 뿐이다.
카뮈는 말했다.
애정 어린 무관심 (Gentle Indifference)*
나는 이 단어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되, 그들을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무관심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시대에서 그런 애정 어린 무관심이 더욱 절실해졌기에 이렇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억지로 이해하거나, 그들에게 억지로 다가가려 하기보다는, 그저 동등한 인간으로서, 동등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의 존재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이 무례와 혐오의 시대에서 가장 인간다운 태도일지도 모른다.
각각의 인간은 다른 모든 이들에게 대해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이란 내가 타인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 것. 그들을 어떤 이등 시민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 그게 진짜 인간다움이 아닐까?
나와 다름을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의 자세, 타인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배제한, 애정 어린 무관심.
그게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태도다.
* 애정 어린 무관심이란 : 원문[이방인]에서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무의미함을 거부하거나 애써 바꾸려 하지 말고 그 자체로 끌어안고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