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시바새끼들을 보게 된다. 그 무례와 혐오 그리고 편 가르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최근 읽고 있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에서도 불과 반세기도 되지 않았던 1950년대의 미국에서도 타인종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있었다. 마치 그 차별이 너무나 정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던 시절이 불과 반세기 전 가장 선진적이라던 미국에서도 있었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은 어떠할까? 여전히 우리 모두는 그런 차별과 무례, 혐오, 나누기를 자행하고 있다. 이것이 어쩌면 인간 본성 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이다.
옛날과 달리 이제 여자들도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 반세기 전 미국에서조차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고, 남성과 동일한 인격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지금 우린 정말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직장, 특히나 남초 제조업 중심의 동남권 공장에서 일하다 보면 그 성별에 대한 무례와 차별, 혐오를 경험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개저씨는 파이낸스직을 '경비 부킹을 대신해 주는 미스킴' 중요한 일은 본인들이 하고, 잡일을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듯 '아 이런 건 미스킴이 대신 입력해 주는데'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남자였더라도 그런 개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
왜 사람은 이토록 타인에게 무례하며, 약자라고 생각할 때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폭력과 차별, 혐오를 보이는 것일까? 인간 자체가 가진 본성 때문일까?
이런 무례의 시대에서 더욱더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간다움'이다. 결핍으로 인해 생긴 갈증일지도 모르겠다.
인간다움이란 타인을 동일한 인격체로 생각하는 것이며,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여력이 있다면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 생각한다.
'각각의 인간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런 인간다움은 때론 외국인들에게 더 느낄 수 있다. 개인사에 너무 오지랖 넓게 참견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하다면 도움을 내밀줄 아는, 그리고 나를 미스킴 이라며 이등시민으로 보지 않고 동등한 자격을 갖춘 인간으로 대우할 줄 아는 그런 인간다움 말이다.
어쩌면 나는 카뮈가 말한 것처럼, 애정 어린 무관심 (Gentle Indifference)를 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오늘과 같이 분열과 혐오의 시대에서 나와 다름을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의 자세를 보이는 것 아니 적어도, 타인에 대한 어떤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배재한 선을 넘지 않는 무관심이 오히려 더 인간다운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