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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콰드에게 배우는 힘의 방식

힘을 가지되, 나로 남는 법

by 따뜻한 불꽃 소예

그는 군주의 옷을 입고 다닌다.

사무실이라는 작은 왕국에서 줄을 세우고, 복종을 시험하며, 두려움이라는 도구로 생존을 증명한다.

그가 말할 때, 나는 뇌가 아니라 위장이 반응했다.

비위가 상했고, 내가 나로서 있는 것이 위협받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렇게까지 해서 지켜야 할 자리는,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존중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란 걸.


그런데 왜 나는 파콰드가 그토록 싫었을까? 나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린다. 그가 한 모든 행동이 거슬렀다. 타인의 인격을 건드리고, 자존감을 짓밟아 굴복시키고, 심리를 조정하려는 교묘한 술수, 엉터리 지식을 내세우고, 때로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통해 무식한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얄박한 쇼맨쉽. 항상 직접적으로 불만을 말하지 않고, 똘마니 혹은 집단의 힘을 끌어다 약자를 굴복시키는 방식이 내 눈엔 훤히 보였다. 그는 무례했으며, 정보를 독점하며 자기 존재감을 과시했다.

사실 나는 그가 그렇게라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나만의 믿음이 있었던 거 같다. 무엇보다 나는, 그에게 조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힘에 대한 저항

나는 권력자와 같은 엄마 밑에서 자라났다. 생활인이었던 엄마는 강했고, 때론 생존을 위해 자존심을 꺾었으며, 장사가 잘될 땐 주위 사람들에게 오만했다. 욕망도, 분노도 참지 않았고 모두 표출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은 절대 닮아선 안 된다고 어른들에게 교육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사회에서 만난 또 다른 엄마 같은 사람 - 파콰드 같은 존재를 본능적으로 거부한 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말했듯,

'내 안에 없는 것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what isn't part of myself doesn't disturb me.'

나를 가장 격렬하게 불편하게 하는 그 모습 안에, 혹시 내가 있지는 않았을까?


그가 힘을 쓰는 방식은 여전히 싫다. 하지만 그것 또한 살아남기 위한 욕망이었고,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어쩌면 나 역시, 누구보다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나를 힘으로 누르려할 때마다, 나는 송곳처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힘을 가지고 싶다.


내가 원하는 힘

나에게 힘이란, 내가 나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타인에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명료한 언어로 존재하는 것.

누군가 내 영역을 침범했을 때, 그 경계를 분명히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타인을 무시하지 않되, 내가 깎여나가지 않도록 선을 그을 수 있는 것.

내가 나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싶다.


#나를치유하는에세이, #내가나를돌보는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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