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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무겁고 높은 것

김기태 단편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by 이재상


송희는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

(중략)

버리려면 들어야 했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달랐다.

(중략)

왜 하필 100킬로그램이야?

(중략)

굳이 이유를 대자면,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야. 그건 더 이상은 어길 수 없는 약속 같은 것이었다.

(중략)

송희는 바벨을 쥐었다. 딱딱하고 차갑다. 하지만 내 손안에 있는 내 것. 내 몫의 약속.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무겁고 높은」 (김기태 지음, 문학동네)





내 몫의 약속을 지키고 버리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


김기태의 단편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 수록된 단편 「무겁고 높은」에서 그은 밑줄들입니다. 소설은 카지노가 들어선 강원도의 어느 탄광촌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3 여고 역도선수 송희의 이야기입니다.


들어 올린다. 그리고 버린다.


작가는 역도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버린다'는 표현이 참 독특하고 오묘합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이 단어 하나가 어떤 맥락에서 쓰이냐에 따라 이렇게 깊고 오묘해질 수 있습니다. 기울고 쇠퇴해 버린 동네,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평범한 선수 송희가 느꼈을 삶의 여러 가지 감정들이 묻어 나오는 표현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 송희는 참 인상 깊은 학생이었습니다. 송희는 100kg이라는 숫자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덤덤했지만 약속에는 진심이었습니다. 100kg이든 110kg이든, 그게 무엇이든 송희는 그것을 목표가 아니라 약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표와 약속. 하나를 두고 달리 표현하는 두 단어가 저에게는 큰 차이로 느껴졌습니다. 목표일 때와 약속일 때의 마음가짐과 느낌이 다릅니다. 약속은 더 '내 것' 같습니다. 목표보다는 약속이 더 귀하게, 더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약속에는 나 자신의 다짐만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인과 나의 관계성도 들어 있습니다. 이 또한 오묘합니다.



나에게 무겁고 높은 것


100kg짜리 바벨은 송희에게 '무겁고 높은 것'입니다.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했고, 성공해도 원하는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송희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이미 끝난 게임이니 짊어지지도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고 나서, 이 지긋한 삶의 무게를 견디고 나서 던져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약속이니까요. 던지고 나서 느껴지는 것. 그 후련함을 성취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소설을 읽고 나니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나에게 '무겁고 높은 것'은 무엇일지, 그게 무엇이든 나는 들어 올리는 순간을 고대하는 건지, 내 던져버리는 순간을 고대하는 건지, 그 고대했던 순간에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은지 말입니다.


이 질문들에 선뜻 무어라 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희에게 100kg이 있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있다고 해야 할지 바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약속할 무엇이 없으니 그 무엇으로부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은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내 앞에 어떤 바벨이 놓여 있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저보다 소설 속 송희가 훨씬 더 어른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아주 독특한 감상과 질문 선물이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 있습니다.



ⓒ 이재상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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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