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7 to Taipei] 밤 운동장을 돌다
여행에서 배낭을 메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우선 체력부터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아침에도 가벼운 산책을 하고 출근을 하기 때문에 나름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배에 살이 찌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앉아만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저녁에 집에서 홈트를 따라 하며 땀을 빼보았지만 살은 조금 빠질지언정 체력이 길러지는 느낌은 없었다. 어쩌다 저녁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 날이 따듯해져서 걷기 딱 좋은 날씨가 되어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걸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나의 행복은 대체로 매우 저렴하다.
산책 코스는 집 근처 대학교 캠퍼스에서 이루어진다. 아침에 그 캠퍼스로 왕복 30분 정도의 산책을 나가는데 산 중턱에 자리한 캠퍼스는 적당히 숨이 차고 걷기만 해도 운동이 되는 딱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산이 캠퍼스를 두르고 있는 형상이라 공기도 매우 좋다. 대학교 캠퍼스에 무인으로 운영되는 편의점이 있는데 아침에 그곳에 들려 갓 내린 커피를 사 오는 게 내 아침 일과다. 원래는 집에서 드립커피를 내려마셨는데, 드립커피에 더 많은 양의 카페인이 들어있다 하여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카페인에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라 최대한 카페인을 적게 섭취하려는 편이다.(적게 섭취하려 노력할지언정 커피를 끊지는 못하겠다.)
아침에 무인 편의점은 매우 편리한 공간이다. 퉁퉁 부은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고 편의점 신상 제품들을 눈치 보지 않고 맘껏 구경할 수도 있다. 결제도 편리하고 할인받을 수 있는 쿠폰이나 카드가 있으면 '잠시만요'하고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돼서 더더욱 편하다. 아침에 무인 편의점을 들러 향긋한 커피를 한 잔 내려오는 재미로 아침에 눈을 뜬다. 커피 맛도 일반 카페 못지않다.
그리고 이제 저녁 코스까지 추가되었다. 캠퍼스 중앙 부분에 운동장이 있는데, 거기서 저녁마다 운동장을 뛰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가볍게 몸을 풀고 보통 6바퀴 정도 운동장을 뛴다. 원래는 하루 지날 때마다 한 바퀴씩 추가하려 했는데 한번 뛰어보고 나니 무릎 건강을 위해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한 바퀴를 돈다.
잡생각이 밀려온다. 여행 가서 뭐 하지? 여행 갔다 와서 뭐 하지? 내 인생을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들은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나는 뭐 하려고 이 세상에 온....
두 바퀴.
저 학생은 이제 집에 가나? 무슨 과일까? 저 캠퍼스는 무슨 건물이지? 내일 아침은 뭘 먹지? 아, 집에 가서 중국어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책도 읽어야....
세 바퀴.
숨이 차기 시작한다. 시끄럽던 머릿속은 어느새 입을 다물었다. 내가 뛰고 있다는 감각만이 느껴진다. 들리는 것은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음악 소리뿐이다.
네 바퀴.
땀이 난다. 콧잔등에 맺힌 땀을 소금기 가득한 손으로 쓱 닦아낸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별이 없다. 어제는 많았는데. 아쉽다.
다섯 바퀴.
오늘 왜 이렇게 습해? 덥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린다. 살짝 멍해진다.
여섯 바퀴.
이제 아무 생각이 없다. 몸이 그냥 움직인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겠다.
그렇게 운동장을 다 돌면 괜히 오늘 하루 잘 산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온다. 벗어두었던 겉옷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아침저녁으로 걷고 뛰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땀이 나야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땀을 내고 나의 땀을 식혀주는 선선한 바람에서 나는 자연의 넓은 아량을 느낀다. 언제 어디에나 있었지만 내가 힘들 때가 돼서야 바람의 소중함을 안다.
밤부터 비가 온다고 한다. 내일 아침엔 우산을 쓰고 나가봐야지. 내일 운동장은 돌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