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롄
화롄은 타이루거 국가공원을 가기 위해 오는 여행객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타이루거를 가는 버스가 잘 되어 있지만, 단 하나 단점. 시간대가 그리 많지 않아 잘 맞춰 타야 한다. 어제 숙소 직원에게 받은 버스 시간표를 보니 6시 30분이 첫 차였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라 일찍 갔다가 일찍 올 예정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5시 58분이었다. 후다닥 씻고 버스정류장까지 뛰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영 일어나고 싶지가 않다. 타이동 이후부터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여행하는 중이라 첫 차는 포기하고 8시 10분에 출발하는 두 번째 차를 타기로 했다. 조금 더 눈을 붙이고 7시쯤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갔다. 두 번째 버스는 딱 시간 맞춰 탈 수 있었다.
국립공원 안내센터에서 하차했다. 시간을 보니 9시가 넘어있었다. 차 안에서 마신 유산균 음료 탓인지 배가 아파 일단 화장실에 들렀다가 안내센터에 가 버스 종점(제일 위)인 천상에서 바이양 트레일이 가능한 지 물었다. 돌아오는 답변. 그 루트는 낙석이 떨어져 봉쇄되었단다. 아쉽게 됐지만 정보를 얻은 걸로 만족. 그리고 잠이 덜 깨 계속 하품이 나오길래 주변에 커피를 살 수 있는 세븐일레븐이 있는지 여쭈었다. 세븐일레븐은 이미 지나왔단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다고. 헉. 꽤 멀다. 왕복 40분을 여기에 쓰긴 좀 아깝다. 그냥 바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구글맵을 켜 가장 가까운 세븐일레븐을 찍으니 10분 거리란다. 왕복 20분이면 할 만하다. 주저 없이 방향을 틀었다. 지금 내가 하는 여행은 시간에 맞춰 논리를 따져가며 하는 여행이 아닌,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하는 여행이다.
커피를 사서 다시 원점에 도착했다. 시간은 좀 흘렀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아침에 비가 왔던 모양인지 산에 풀 향기가 가득했다. 위에 올라오니 제법 쌀쌀하다.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사길 잘했다. 손에 커피를 들고 커피 향 한번, 산 내음 한번 맡으니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싶다.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며 샤카당 트레일부터 시작했다.
걸어가는데 뒤에 한 커플이 드라이버와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드라이버는 차를 몰고 떠나고 커플만 내 뒤로 트레일을 시작했다. 차를 렌트한 모양이다. 그렇게 그 커플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트레일을 하는 도중이었다.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싱긋 웃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그녀에게 왜 그러냐 물으니 똑같은 길인데 출렁다리로 건너려고 돌아온다 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출렁다리로 건너기로 했다.
그렇게 트레일을 하며 드문 드문 말을 하다가 길이 나눠지는 곳에서 그녀가 어디로 가냐며 물어봤다. 나는 일단 화장실에 가고 싶어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며 화장실에 가고 싶다 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조금 더 올라가면 상점이 있으니 거기에 화장실이 있지 않을까 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길을 더 올라가자 커피와 음료, 소시지를 파는 상점이 나왔고 다행히 화장실이 있었다. 그런데 입장료가 있다. 10위안. 하필이면 동전을 다 썼다. 100위안짜리를 꺼내어 상점에서 바꾸려 하는데 남편분이 10위안을 건네주신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일단 한시가 급해 땡큐, 땡큐를 외치며 그녀와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입장료까지 있는 화장실치고는 너무 허름했다.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껐다.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이제야 가게에서 뭘 파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소시지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미리 챙겨간 바나나와 빵이 있어 먹지 않기로 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내가 입맛에 맞지 않아 먹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 소시지를 한 입 먹어보라며 건넨다. 망설이다가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이건 먹어야 해. 바로 엄지 척을 했다. 가격은 50위안. 비싸지만 그래도 관광지니까 어쩔 수 없고, 일단 맛있어서 괜찮았다. 소시지에 maqaw라고 하는 후추가 통으로 박혀있다. 그런데 후추가 맵지 않고, 경상도에서 먹는 산초가루 맛이 난다.
그렇게 허기를 달래고 다시 돌아가는 길. 다음은 어디로 가냐 묻는 그녀. 그냥 버스 시간에 맞춰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 게 내 유일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버스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갑자기 배가 고프지 않냐며 같이 점심을 먹고 본인들이 갈 코스에 같이 가지 않겠냐 한다.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다만 그래도 되나 싶어서 몇 번이고 괜찮겠냐 물으니 괜찮단다. 그렇다면,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차도 얻어 타고, 밥도 얻어먹었다. 나도 돈을 내겠다니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진짜 뭐지. 아무 계획이 없었는데 끝내주게 잘 먹고, 잘 다녔다. 인복이란 게 정말로 있나 보다. 내게. 너무 고마워서 돌아다니다가 로이(남편)가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기에 밍옌(아내)에게도 원하는 게 있냐 물었다. 내가 사겠다니 고맙다며 인사를 한다. 노노노. 둘 손에 음료 한 잔씩을 쥐어주니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인다.
한국어를 혼자 공부했다는 밍옌. 한국을 매우 좋아하는 듯했다. 너무 고마워서 둘의 사진을 최대한 잘 찍어주려 노력했다. 싱가포르에서 아이를 낳고 늦은 허니문을 왔다는 둘. 아들과 함께 지금처럼 백년해로하길.
그들이 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고마운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다.
밍옌, 로이. 謝謝你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