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이 Jan 19. 2022

 서울 전시회, 완판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따뜻한 성원으로 다섯 번째 개인전 메타포트레이트가 완판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전속작가라는 울타리를 나온 후 치른 첫 홀로서기 개인전이었기에 그만큼 두려움과 부담이 컸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감사한 영광을 또다시 안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따로 감사인사 전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이 이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미국에서부터 제주 서울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화가로서의 삶은 제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제야 그 밑거름을 바탕으로 작은 새싹 하나가 겨우 땅 위로 고개를 내밀수 있을까요. 올 한 해도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잔잔한 울림을 더할 수 있는 따뜻한 그림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때로는 대중적인 그림이라서 잘 팔린다라는 말도 듣습니다. 맞는 말씀들이시고요. 다만 대중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그림이라고 하여 쉽게 그려내거나 철학이 없는 그림은 아니라는 것, 붓한번 휘둘러 명작을 만들어내는 대가의 그림도 예술이오나 그보다는 서투른 천 번의 붓질 또한 못지 않은 열정과 땀으로 만들어지는 전자와 다르지 않은 또 다른 결의 예술이라는 것을.


화가 또한 몸을 움직이는 노동자일 뿐이다라는 박서보 화백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손은 놀리며 입으로만 화가라 떠들지 않고 노동자의 부지런한 손을 겸허히, 확고히 따르겠습니다.


2022년 1월 19일 서양화가 김재이 올림.


김재이의 메타포트레이트 개인전은 서울, 살롱드아트에서 1월 28일까지 개최됩니다.

오랜기간 고생하고 계시는 갤러리 살롱드아트 대표님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굴속에 숨어 살아도 인연은 스며드는 공기처럼 막을 길이 없나 봅니다.

미술가라면 누구나 한 번 즘은 받고 싶다는 평론에 저는 도통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기사 그것은 오만이라기보다 비전공자의 무지였던 듯합니다. 


언제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갔습니다. 누군가 영향력 있다는 분을 소개해준다고 해도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는 데까지 오랜 시간과 공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화가라는 이 일을 늦게 시작하여 아직도 모자란 점이 많으나 그에 비하여 보는 눈 만큼은 나이에 비례하는 듯 하늘 높은줄 모르고 높으니 남이 아니라 내 눈을 따라가는 데만도 시간, 분초가 다급하답니다. 그만큼 누군가를 새로이 만나 내 화가로서의 앞날에 무언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웃거릴,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회를 앞두고 평론을 써주신 미술 평론가이시자 제주 현대 미술관 관장님이신 변종필 관장님과의 인연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번 서울 전시회가 열릴 갤러리 살롱드아트 대표님의 변관장 님과의 만남 권유에도 여러 차례 힘들게 거절하였으나 저보다도 더 고집이 세신 대표님께서 끝내 변관장 님을 제 작업실로 모시고 오신 날, 작품만 보고 가실 거라는 대표님의 말씀에 왠지 믿음이 가지 않고 불안하던 마음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세네 시간에 이르는 릴레이 토론은 '당하고' 뒤돌아 보니 압박면접에 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내 안의 그림에 대한 욕망들을 끝끝내 표면으로 분출시키시고는 승전보를 울리시며 퇴장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그분이 정말 평론을 써주셨어요?'라고 되묻습니다. '평론가가 평론을 써준 것이 대단한 일인가요?' 대단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분이 미술계에서 그다지도 저명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인터뷰였으나 한 번은 겪어볼 만한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날카롭고 따뜻한 평론, 잊지 않겠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평론 : 해녀의 꿈에 담아낸 희망, 그리고 그리움

김재이는 해녀화가로 알려졌다. 수년째 제주 해녀를 그리면서 붙여진 수식어다. 

해녀 화가란 수식어처럼 그의 주요 그림에는 해녀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그림 속 해녀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해녀의 모습과는 다르다. 밝고 희망 가득한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마치 동화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의 그림에는 애틋함, 따뜻함, 즐거움, 행복함, 그리고 낭만이 있다. 김재이 그림에 담긴 색다른 감정들이다. 

이번 서울에서 여는 첫 개인전 <Meta-Portrait>에 선보이는 신작들 역시 제주 해녀를 주제로 삼았다. 작품의 크기, 다양한 내러티브, 변화된 구성과 표현 등에서 한층 깊고 탄탄해졌다.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가 담긴 <첫소랑>을 시작으로 강렬한 색채대비가 돋보이는 <칸나>, 휴대폰 앞에서 V자를 그리며 사진 찍는 두 해녀를 그린 <물벗>, 거울과 화폭 속 자아를 마주하지 못하는 모습을 담은 <타인의 자화상>시리즈와 둥근 달 밤하늘을 유영하는 해녀를 담은 <모일 모월>과 <월량화>, 자전적인 그림<시계 공감> 그리고 소녀의 간절함을 담은 <수국소녀>까지 한편의 이야기처럼 제작한 구성이 새롭다. 특히 <타인의 자화상> 시리즈는 모델 해녀와 화가의 내면적 심리가 오버랩되면서 전작과 다른 중의성이 강해졌다. 전반적으로 해녀에 관한 앎이 깊어져 담긴 이야기와 그림도 그만큼 깊어졌다. 

김재이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 2017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랜 꿈이었던 화가의 길을 선택한 지 이제 5년째이다. 화가의 삶을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기다림은 오랜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5년 동안 마치 미뤄두었던 오랜 과제를 한꺼번에 해치우듯 그림에만 집중하고, 미국과 국내에서 네 번의 개인전도 가졌다. 그는 소위 그림 그리는 기법이나 방식, 구도나 형태 등 미술대학에서 배우는 과정을 독자적으로 습득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화면의 조형성 탐구나 색채연구, 또는 새로운 재료의 확장이나 실험적 시도 등과는 거리가 있다. 대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화면구성, 인물표현 등에 자신의 조형 감각을 과감하게 발휘했다. 데생의 정확도나 재현에 의미를 두기보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충실했다. 마치 내면에 응축된 욕망을 하나둘 꺼내듯 화면구도부터 색채, 인물표현까지 자기 생각과 감정에 솔직하다. 이것이 김재이 그림의 차별점이며, 그만의 개성 짙은 내러티브를 이어가는 힘이다. 그의 그림은 누구나 거부감 없이 다가설 수 있는 삶의 이야기를 지향한다. 


그런데, 왜 해녀일까? 제주 해녀는 김재이에게 어떤 존재 의미일까? 

과거 제주의 어멍(어머니)들 중 잠녀(潛女)가 많았다. 잠녀는 제주식 표현으로 잠녀, 잠네, 잠수라고 한다. 모두 ‘잠수(潛水)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제주의 잠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잠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현대인에게는 잠녀보다는 해녀라는 용어가 익숙하다.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 속의 해녀(잠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지만, 김재이는 그림으로나마 제주 해녀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열었던 해녀 그림 전시를 계기로 해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리기 위해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라고 했던 어느 인터뷰 기사처럼 그의 그림은 제주 해녀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한다. “여러 분야 예술가들의 노력으로 해녀가 자연 친화적인 전문 여성직으로 서서히 알려지게 된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낀다”라고 했던 말에서도 그가 제주 해녀 그림으로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이유가 묻어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제주 해녀의 삶과 이야기가 곧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있다. 그는 제주 해녀의 고단한 일상 속에 묻어둔 내면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즐겁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존재임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앞서 말했듯이 김재이의 그림 속 해녀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늘 젊고, 건강한 모습이다. 실존하는 해녀를 작품의 모티브로 삼았지만, 현재의 모습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예뻤던 순간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다. 현실에서는 오랜 물질로 이미 젊음을 잃어버렸지만, ‘나도 한때는....’이라는 마음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을 모델 대신 회상하고, 추억하고 상상하며 그린다. 김재이의 해녀 그림이 여느 인물화와 다른 지점이다. 이는 신작에서도 확인된다. 


첫소랑 Oil on Canvas 91x65cm


수국 앞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해녀의 <첫소랑>은 그 자체로 사랑가득한 그림이다. 방금 물질해서 따온 오분자기를 손에 쥐고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은 설렘과 수줍음으로 가득하다. 화면의 절반을 차지한 분홍색 수국이 ‘처녀의 꿈’이라는 꽃말처럼 소녀의 진심을 대변한다. 소녀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나뭇잎 사이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고양이는 우리(보는 이)의 마음 같다. 사랑하는 이가 빨리 나와 소녀의 진심을 받아주면 좋겠다. 첫사랑을 수줍게 기다리는 모습이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속전속결로 이어지는 신세대의 첫사랑과는 사뭇 다르다. 첫사랑은 다른 사랑을 만나든지, 세월이 흐르든지 언제나 비자발적 기억으로 떠오른다. <첫소랑>이 빛바랜 사진첩에서 꺼내든 해녀 할망의 옛이야기 같다면, <물벗> 그림은 현대적이다. 휴대폰 앞에서 V자를 그리며 사진 찍는 모습이 영락없는 요즘 젊은 세대를 대변한다. 물벗은 해녀들이 물속에서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짝을 일컫는다. 바닷속에서 믿고 의지할 것은 오직 자신과 함께 물질하는 물벗 밖에 없다. 사소한 오해와 편견들에 얽매이는 사이는 서로를 지켜주는 물벗이 될 수 없다.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다. 뭍에서도 물벗처럼 서로 이해하고 지켜주는 벗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칸나 Oil on Canvas 162×112cm


그림에서 색은 보는 이의 즉각적인 감정반응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요소(요인)이다. 흑백사진이 컬러사진으로 바뀌면서 일으킨 사람의 감정반응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이 점에서 김재이의 회화 색은 그림 속 이야기를 전달하는 신호이며 표시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감정과 상징이 다양한 색으로 표현된다.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조가 주를 이루는 그림도 있고, 열정적인 색으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그림도 있다. <칸나>가 후자에 속한다. 물소중이 차림의 해녀를 중심으로 화면이 색으로 양분되어 있다. 칸나의 초록색과 물결처럼 휘날리는 검은 머리의 붉은 배경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인물이 중심이지만, 노란 꽃 칸나와 열정의 온도 같은 붉은 배경이 해녀의 꿈과 마음을 상징한다.



이번 전시 작품들 중 가장 주목할 그림은 <타인의 자화상> 시리즈이다. <Meta-Portrait>를 전시 타이틀로 내세운 의도와 함께 작품 의미를 반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자화상1>의 그림 속 모델은 3대째 해녀를 하는 집안의 딸이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에서는 해녀라는 인상을 받기 어렵다. 여타 해녀 그림보다 화면구성과 분위기,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옷차림 등에서 차이가 있다. 사실 작가의 말을 듣기 전까지 그림만으로는 쉽게 해녀라는 인상을 받기 어렵다. 타인의 자화상 시리즈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화면 속 해녀(모델)의 등문신이다. 불사조는 실제 모델의 등문신이고, 목단은 작가의 창작이다. 문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면 위쪽의 반사된 거울에 비친 등을 보면 혹등고래 문신이 보인다. 결국, 상처투성이 혹등고래와 불멸의 새를 새긴 문신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해녀의 몸과 마음을 대변한 표현으로 읽힌다. 

거울 앞의 모델(해녀)은 정작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느낌이랄까. 우리가 거울을 볼 때, 현실의 자신과 거울 속 자신은 동일인이지만, 자신이 꿈꿔왔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은 같지 않을 때, 그리고 문득 거울 속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때 자신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표현은 거울 속 모습을 외면(혹은 부정)하고 싶은 심리로 읽힌다. 


타인의 자화상3 Oil on Canvas 91x72.7cm


타인의 자화상 시리즈의 또 다른 특징은 오랜 시간 간직해온 자신의 꿈과 제주 해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그림에는 작가의 삶을 대변하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을 오마주한 그림을 앞에 두고 눈을 감은 채 외면하는 <타인의 자화상>이 그렇다. 이 그림에는 해녀와 화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꿈이 화면에서 교차 된다. 액자 속 그림은 혼란과 격변의 시대에 현실을 직시하며, 화가로서 삶의 태도를 당당하게 밝힌 한국 근대미술사의 비운의 천재 화가 이쾌대의 자화상을 차용했다. 

‘자화상’은 미술사를 통틀어 자아의 진정한 본성, 이른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에 시각적으로 해답을 구해온 표현 영역이다. 김재이는 이쾌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대신 그려 넣었지만, 표정은 역시 눈을 감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모델도 눈을 감은 채, 화가그림을 외면한다. 이는 결국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지, 지금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의 표현이다. 이처럼 타인시리즈는 내면의 심리 상태와 현실 상황의 대립, 과거의 꿈과 현실의 대립 등 복잡한 내면의 심리적 표현이 핵심이다. 특히 이러한 심리적 표현은 화면에 등장하는 거울과 액자를 통해서 전달된다. <타인의 자화상1>과 <타인의 자화상2>에 등장하는 거울은 미술사의 수많은 작품에서 상징적 의미로 자주 사용했던 소재이다. 거울은 실재의 반사, 본질의 그림자, 자아(자신)의 분신으로 해석되는 오브제이다. 거울은 본연의 자아를 각성하는 동시에 또 다른 자의식을 반추하는 이중성, 중의성, 양면성을 지닌 사물로 해석될 수 있다.


시계(視界) 동감 Oil on Canvas 73x53cm


한편, 모델 대신 어린 피에로의 초상화가 등장하는 <시계 공감> 연작은 한층 자전적 고백이 강하다. 역시 거울과 액자를 통한 ‘그림 속의 그림’,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뜻하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구성 기법을 사용했다. 서사에 중의적 의미를 가미하기 위한 선택으로 효과적이다. <시계 공감> 연작은 상체를 드러낸 여인이 액자 속 피에로를 마주 보거나, 피에로의 시선을 피해 그림책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다. 상체를 드러낸 표현은 어떤 성적인 자극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외피(두려움, 편견, 자격지심 등)를 벗어던진 의미이다. 액자 속 어린 피에로(과거 자신)를 외면하듯 지그시 눈을 감은 설정은 이 그림에서도 반복된다. 역시 과거의 자신을 외면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엿보인다. 그러나 궁극에 ‘시계 공감’ 연작은 과거 속 자신과 꿈을 지닌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는 다르지 않다는 자기 고백적 그림이다.


다시, 해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른 그림을 보자. 둥근 달을 배경으로 물수건에 물소중이 차림의 해녀가 바다가 아닌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을 그린 <모일모월>과 <월량화>은 전작에서 즐겨 그린 구성이다. 달이 등장하는 그림의 화면구성은 단순하지만, 내용은 이상향을 향한 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녀라는 인어가 바닷속을 비추던 보름달 빛에 이끌려 물 밖으로 뛰어오른 것처럼. 이상을 향해 날아오르고 싶은 모습이다. 동시에 꿈을 향해 날고 싶은 화가의 마음도 내재 되어 있다. ‘해녀라는 인어로 산다는 것’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사는 것이며, 바다의 여자로 사는 것이다. ‘바다는 저물어 갈 때 진실의 소리를 낸다’는 말이 있다. 해녀는 둥근 달이 떠오른 날 바닷속을 뛰쳐나와 밤하늘을 날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전한다. 어쩌면 보름달이 소원을 이뤄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행동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달은 테왁을 상징한다. 테왁은 바다에서 해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보조 장치이다. 해녀에게 물속은 참을 수 있는 시간, 그리고 깊이와 전쟁하는 공간이다. 테왁은 차오른 숨을 참았다가 해면으로 올라와 붙들고 참았던 숨을 내뿜을 때 사용한다. 그래서 김재이에게 달은 특정 메시지가 담긴 소재보다는 하나의 부적 같은 존재이다. 실제로 그는 “마음이 평화롭지 않으면 달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맑은 정신과 따뜻한 마음으로 행복해지는 그림을 그리려는 그의 노력은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에게도 좋은 기운이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읽힌다. 



전시를 위해 마지막으로 그린 <수국소녀>는 어딘지 <첫소랑>과 연결된 느낌이다.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서 있는 <첫소랑>의 소녀와 다르게 얼굴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구성이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크게 뜬 눈망울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모습은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푸른 바다색 치마가 파도 물결처럼 휘날리는 것으로 보아 바다에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은 모양이다. 물질 나간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이 걱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소녀의 꿈’을 상징하는 수국이 돌담 가득 피어나 소녀의 마음을 대신 전해준다. <수국소녀>가 전시를 앞둔 화가의 마음 같다.



수국 소녀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자신을 돌아볼까? 누군가의 삶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때처럼 김재이의 그림은 제주 해녀를 통해 스스로 삶을 돌아보게 한다. 김재이의 신작을 제작과정에 따라 살펴본 결과 출품작들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내러티브를 지녔다. 처음부터 철저한 의도로 제작한 듯 흥미롭다. 동시에 볼수록 화가로서 욕망이 세세히 느껴진다. 

김재이 그림은 제주 해녀, 은유적 표현, 독특한 화면구성과 내러티브 등 분명한 자기 조형 언어를 지녔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개성 강한 조형 언어로 흔들리지 않고, 소신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김재이의 큰 장점이다. 이제는 화가로서 일상을 굳이 드러내거나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일상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일상인 것처럼 김재이의 일상은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화가의 삶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의 진짜 해녀처럼 화가의 삶을 위해 예술이라는 넓은 바닷속을 깊게, 또 오랫동안 머물며 자신의 꿈과 이야기를 하나둘 캐 올릴 것이다. 지금 그의 그림은 해녀들이 오랜 물숨 끝에 물 밖으로 나오며 내뱉는 숨비소리 같다. 


변종필(미술평론가, 제주현대미술관장)





갤러리 살롱드아트  Director,  Sofia Shin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던 오스카와일드의 말을 인용한다면 적절할까요?

김재이 작가는 주목하지 않았던 대상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화가입니다. 

깨닫지 못했던 대상의 아름다움은 아티스트의 인지에 의해 새롭게 탄생합니다. 

붓을 든 그는 이 시대 미술 애호가가 그리워하는 거침없이 나아 가는 painter 입니다.

짧지 않은 5년여의 시간 동안 김재이 작가는 해녀란 '너'를 통해 보게 되는 내러티브를 

그만의 그림으로 그려왔습니다 . 김재이 작가는 해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잘 볼 수 있게 되었던 거죠.

이번 전시는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 타인의 자화상 」에서 

해녀 '너' 곁에, 작가 김재이 '나'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너를 통해 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를 보기 시작한 작가 김재이가 앞으로 그려갈 미지의 세계.

이 겨울이 살롱드아트에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평론 : 타인의 자화상: 오스카 와일드, 이쾌대, 그리고 김재이의 Meta-Portrait


인간이 거울을 본 이래로 자화상은 계속되었다. 거울 이전에 이미 개울가에서 인간은, 동물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내가 비추인 상과 내가 그리는 자화상은 다르다.

물가에,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고, 아마도 다른 사람이 그려준 초상화와 사진에 만족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사진을 이리 저리 자르고 늘이고 뽀샵한다. 자신의 초상화는 그저 그림일 뿐, 작가의 표현일 뿐이라고 여기며 거리를 둔다.


그러나, 자화상은 다르다. 자화상은 온전히 작가의 책임이다. 재료도 자신이고 분장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며 그리는 사람도 자신이며 순간의 표정과 표현도 자신에게서 나온다. 작품의 완성을 결정하는 것도 자신, 작품의 공개를 결정하는 것도 자신이다.


렘브란트의 젊은 시절의 자화상과 말년의 자화상은 그의 삶과 인물 자체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썸머리인 동시에 두 점을 이어 내삽하면 그가 어떤 궤적을 걸어왔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고호의 자화상 역시 그 작품 안에 인물 고호와 작품 세계를 그대로 함축해 놓았다. 그의 인생과 작품을 아는 사람들은 자화상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연민과 경외를 동시에 보내게 된다. 이러한 완벽한 자화상 작품이 이미 존재하는 미술 세계에 작가는 어떤 자화상을 내놓아야 할 것인가? 


2017년 5월 런던 사치(Saatchi) 갤러리에서 열린 스마트폰시대의 셀피전(“From Selfie to Self-Expression")을 참관한 일이 있다. 전세계 모든 이들이 오늘도 디지털 자화상을 순간 그렸다 지웠다 고쳤다를 반복하는 자화상 범람의 시대에 작가는 어떤 벽돌 하나를 세계에 던져 올릴 것인가?

김재이 작가는 벽돌의 주제를 '타인의 자화상'으로 잡았다. 갤러리 살롱드아트는 이를 Meta-Portrait로 번역하며 새 말을 창조한다.



이쾌대의 정말 멋진 자화상이 있다. 그런 색깔의 물감이 당시에 있었나 싶은 경쾌한 컬러에 당시에 자신이 얼마나 섹시했는지를 자랑하는 듯 살아 움직인다. 심지어 그의 팔렛트는 마치 스마트폰을 들고 있나 하는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핸디하다. 그의 삶과 스타일, 그리고 일본 유학 시기와 전성기, 그리고 월북 직전까지의 그 현란한 작품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재이는 이쾌대에 대한 오마쥬를 메타포트레이트로 표한다. 자신의 얼굴을 이쾌대의 그것과 합성한다. 이쾌대의 뒷모습은 자신의 뒷모습으로 대신 보여준다. 이쾌대의 얼굴은 이제 김재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이쾌대가 하지 못한 말은 작품속 여인의 어깨 문신에 암호로 새겨져있다. 이 암호는 훗날 미술연구가들이 풀어야 할 비밀키이다.


그런데 일견 이 작품은 이쾌대 자화상 앞에서 사진을 찍은 건 아닐까 하는 효과를 준다. 사실적 묘사가, 순간 제3자가 찍은 사진의 느낌을 준다. 또는 작가의 등 뒤에 거울이 있고 타이머를 맞추어 놓은 셀카가 숨겨져있는.. 또는 누군가가 전시관 구석에 놓여있는 이쾌대 자화상 앞에 앉은 토플리스의 여성을 몰래 찍은듯한 느낌이다.


반나의 여성은 꿈을 꾸는듯 하다. 어쩌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다 지쳐 잠이 들었는데 꿈의 공간에서 갑자기 이쾌대가 떠오른 건 아닐까? 그리고 놀랍게도 꿈에서 자기 자신의 뒷모습이 노출된 영상을 기억한 것은 아닐까?


김재이는 이렇게, 다양한 즐김이 가능한 메타 포트레이트들을 내놓았다. 우리말로는 타인의 자화상이란다. 타인을 그린 자화상이라는 것인지 타인이 그린 자화상이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둘 다 자화상의 개념과 모순된다. 타인의 자화상이라니..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이미 메타버스임을 자각한다면 우리의 자화상도 이미 메타포트레이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메타버스의 한 축이 거울 세계(Mirror Worlds)인 것처럼 자화상은 거울에 비춘 듯한 자신의 상으로 시작하지만, 사진이나 거울이 순간만을 포착하는 반면, 작가의 자화상은 자신의 삶의 시공간을 압축하는 라이프로그(Lifelogging)가 되어 다시 메타버스의 한 축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김재이가 이미 보여준 것처럼 이쾌대의 자화상이 놓여있는 붉은 방 구석은 가상의 세계(Virtual Worlds)이다. 실재한 적이 없는 꿈의 공간이라는 면에서 또 하나의 메타버스 차원으로 연결되며, 이쾌대의 얼굴에 김재이 작가의 모습이 살짝 비치며 동시에 김재이의 다른 메타포트레이트에는 없는 어깨 문신은 이 자화상이 가상현실인 동시에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임을 보여주어 메타버스의 네가지 세계를 모두 담아내었다. 김재이는 아마도 메타버스라는 용어와 이론, 유행의 영향력이 가장 작은 제주에 살고 있어서 이를 의식하지는 못하고 작품을 했으리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천재는 늘 미래를 예지하는 법.


도발적 섹시 천재 오스카 와일드는 이미 131년전에 메타포트레이트를 선지했다. 현실 인물은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며, 대신 그의 초상이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도피로서의 초상, 꿈의 반영으로서의 초상, 늙은이의 젊은 얼굴이 현실인지, 젊고 잘생겼던 이를 그린 초상이 늙어가는 것이 현실인지, 이분법으로는 분간할 수 없다. 만져지는 얼굴이 타인인가? 늙어가는 초상속 인물이 타인인가? 무엇이 타인의 자화상인가? 그러나 메타버스로 보면 이상할 것이 없다. 메타포트레이트의 전형이다.


오징어게임으로 이제 겨우, 너무나도 늦게, 국제적 유명세를 타게 된 또다른 천재 정재일의 <도레안 그레이의 초상>을 다시 보고 듣고 싶어진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클럽 살로메>도.



2021을 마감하며 2022를 여는 살롱드아트의 김재이 작가 초대전 Meta-Portrait.


감상자는 김재이의 여러 메타포트레이트를 보며 자신을 그린 타인의 자화상을, 자신이 그린 타인의 자화상을, 타인이 들어간 자신의 자화상을, 타인의 눈에 비칠 자신의 자화상을 메타버스 속에서 그려보게 될 것이다.


나도 나만의 메타포트레이트를 가지고 싶다.


Written by Meta-Lord Henry Wotton   2021.11.28








매거진의 이전글 드뷔시의 달빛_ 유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