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림의 끝에는 '자기 인식'이 있다.
나는 현재 취업 시장에 내던져진 대졸 백수다. 올해 2월 학생 신분에서 말끔히 졸업하고 이제는 소위 '취준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먼저 취업을 한다고 한 적은 없지만 일이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취업이란 나에게는 아직 너무나도 아득한 단어로 느껴진다. 그간 이 한 몸의 아바타로 살아가면서, 어쩌면 나라는 아바타는 취업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간 아이스크림 가게, 샐러드 가게, 한복 가게, SPA 옷집, 백화점 옷집, 디자인실 인턴 등등 약 10번 내외의 알바 경력을 가지고 있으나 언제나 이 모든 것은 입사 후 최소 1일에서부터 3개월 이내에 퇴사로 이어졌다. 퇴사가 말이 쉬워 퇴사지, 말하자면 대부분은 '짤린' 경험이었다.
최근에도 백수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집 근처 백화점의 옷집에 이력서를 넣었고 면접을 했다. 그런데 참 이러기도 어려울 텐데, 일을 시작한 첫 날에 짤렸다. 사회적으로 제 구실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칙연산도 하고, 말도 하고, 공들여 노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점주들의 눈에는 그다지 마땅치 않은 모습으로 출력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또' 짤리고선 눈물도 안 나더라. 사실은 눈물이 나려고 했는데 참았다. 눈물나는 현실의 배후에 존재하는 그 진실을 너무 알고 싶어서,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는 이유가 뭘까 분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살면서 성과도 좋고 기분도 좋았던 활동과 그 환경의 특징, 한편으로는 성과도 안 좋았고 기분도 안 좋았던 활동과 그 환경의 특징을 모두 낱낱이 적어보았다.
이 아래에는 최근 알바에서 짤린 후 근처 도서관 열람실에 가서 고심하며 적은 내용이다. (편집 없음)
<내가 뭔가 성과도 좋고 기분도 좋았던 때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하고있었을까>
1. 내가 스스로 *리드할 수 있는 환경/상황에서 전문성(음악, 사업, 디자인)을 발휘하는 일.
*리드 = 주도 = 나만의 기준에서 창의성/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ex) 프리드 첫 번째 프로젝트
2. 졸업작품전.
사실은 나 혼자 시작하고 마무리해서 잘 해낼 수 있었음.
(리미트 기간이 있고, 정기적으로 할당량 점검.)
<내가 뭔가 성과도 안 좋고 기분도 안 좋았던 때>
1. 한 사람 이상의 뭔가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을 때
*일 = 돈 버는 개념 = 바라는 기준에서 훨씬 엄격
2. 그 사람이 나라는 인간을 잘 모를 때 (친하지 않을 때)
3. 내가 하는 일에 중간중간에 *태클을 받을 때 - 내가 하는 일에 대해/나에 대해 믿지 않을 때
*태클 = 물론 컨펌 형식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나의 일에 대해 한 번 태클 건 사람은 결국 나와 잘 안 맞고 잘 안 되더라. (한 쪽에서 그러거나 쌍방이거나)
<그러면 반대로>
1. 혼자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2. 둘 이상일 때 그 상대가 나에 대해서 작은 부분이라도 알고 (아주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3.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신뢰할 때.
4. 스스로 리드할 수 있는 일
5. 내가 자신 있는 일
이렇게 조금 적어보니 답이 나왔다. 그렇다고 그 답이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확히 알게 된 것은 내가 앞으로는 나에게 맞지 않는 일에 대해서 아등바등 노력하며 살지 않아도 될 거라는 거였다. 왜냐면 나는 내가 분명히 잘하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시작이고, '실천'만이 나를 그 '인지'로 이끌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시도하고 짤린 알바 또한 사실 그러한 '실천'의 하나였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한 무지에 의한 실천이었으나, 그 '실천'을 통해서 나는 잘 맞지 않는 일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므로 하나의 수업이었다. 속 쓰린 수업!
짤린 그 날 도서관 열람실에서, 홀로 작은 노트에 줄줄이 글을 쓰다 보니 결국엔 내가 그동안 도전해보고 싶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전에는 99%의 용기는 있었지만 1%의 정보가 부족했던 일이 하나 생각이 났다. 바로 기타 레슨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도서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음악 레슨실을 빌렸다. 책상 하나 들어가면 방의 1/2이 찰 것 같은 작은 방이었지만, 좋아하는 가수 앨범 사진을 붙여놓아 인테리어 할 생각에 조금은 설레기 시작했다. 일단 한 달을 계약했고 나는 레슨실을 나섰다.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길... 옅은 미소를 띈 표정을 비추어보기에 충분히 밝은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