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부터의 이별과 치유
어디 가서 언니가 두 명이라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부러워한다. 언니들이 있다는 것은 물론 실보다는 득이 많은 환경이다. 언니들에게서는 여러모로 배울 것도 많고, 옷이나 물건도 나눠 쓸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부러움의 목소리를 들으면 항상 놓치지 않고 하는 대답이 있다.
"근데 가끔은 엄마가 세 명인 것 같아."
언니가 둘이라는 건, 나를 뜬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세 명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한 번 혼날 것을 세 번 혼날 때도 있었다. 스무 살 무렵 한창 대학 동기들과 선배들과 음주가무를 즐기던 때였다. 나는 막차는 타야 한다는 무언의 법칙에 묶여 매번 2차에서 맥을 끊고 아쉽게 술자리를 빠져나와야 했다.
하루는 그런 일도 있었다. 밤 10시 즈음이었는데 내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엄마와 언니가 술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데도 부끄러운 기억은 또렷하다. 마치 범죄자를 연행하듯 엄마와 언니는 양쪽 팔에 팔짱을 끼고 나를 택시에 들이밀었다. 지금 떠올려봐도 아주 우스꽝스러운 장면이다.
다음날 나는 뜨겁게 울렁이는 속을 뒤로하고 한겨울 호숫가처럼 꽝꽝 얼은 표정들을 세 번이나 마주해야만 했다. 가족 면담도 똑같은 말로 세 번 반복되었다. 하물며 강아지들도 강조되고 반복되는 소리를 싫어한다는데 인간인 나는 어땠을까.
나는 거의 평생 동안 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버둥대며 살아왔던 것 같다. 가족들에게 나는 언제나 '애'였다. 뭘 해도 항상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을 받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살았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들은 항상 앞서 있었다.
이 세상에 먼저 태어났다는 것 그 자체로만은 원망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내가 분노했던 지점은 따로 있었다. 그들만의 경험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 인생에 불편하게 참견하는 일이었다. 나이로 판별되는 위계가 필연적인 사회 속에서 나는 항상 어리고 잘 모르고 미숙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것은 가족사회를 넘어서도 만연한 한국 사회의 존재 법칙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나는 드디어 위계질서적 사회를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독립적으로 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생 때 잠깐 인턴으로 경험한 회사생활은 생각보다 더 잘 맞지 않았다. 회사는 이미 모든 규격이 갖춰진 채로 태엽이 돌아가듯 운영되는 곳이었지만, 나는 저 멀리서 홀로 활주 하는 자유로운 새와 같은 영혼이었다. 함께 일했던 회사 동료들에게도 나처럼 왈가닥한 예술가형 기질의 신입사원은 불편했을 테다.
몸에 맞지 않는 것들과 이별하고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흥미를 따라 여러 가지 활동들을 시도했다. 그것은 사회의 틀이 아닌 나의 틀에 맞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같은 결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하나 둘 찾아들었다.
비건을 지향하는 나는 채식과 관련한 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혼자라도 꼭 찾았다. 그곳에서 비건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교류하며 지낸다. 평소 책과 글쓰기를 좋아해서 독립출판을 목표로 하는 수업을 덜컥 신청해 보았는데, 그곳에서도 나와 관심사가 같은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관심사로 비롯된 만남에서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았다. 언니, 오빠, 누나, 형과 같은 위계적 호칭보다는 각자가 원하는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기도 했다. 나이가 적고 많음에 관계없이 존댓말을 썼다. 각자의 직업이나 사회적인 타이틀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를 나의 역사로 이해하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의 나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눈을 붙이고 존중과 배려를 통해 관계를 맺어나갔다. 그것은 친밀함보다는 어색함에 가까웠지만 기분좋은 어색함은 각자의 안전지대를 지켜줄 수 있는 장치이기도 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우리는 모두 친밀함을 갈구하며 살지만 친밀감의 세계에도 양면성이 있다.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알게 모르게 침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가족은 쉽게 친밀하게 된다. 서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살기 때문이다. 함께 살다 보면 무심코 서로의 안전지대를 넘게 되는데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주로 침범의 불쾌도 허용된다.
누군가는 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다뤄야 한다고 했다. 난로는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지만 너무 가까워지는 순간 데기 때문에 약 3cm의 틈을 남겨두어야 한다. 가족관계도 엄밀히 보면 타인과 맺는 인간관계이고,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성인이 되면 각자의 개별성이 점차 드러나게 되어있으니 3cm의 간격은 더욱 중요해진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점점 가족적인 친밀감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것은 내 삶의 역사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이자, 과거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동안 내 모습이라고 믿던 에고를 산산조각 내어 수없이 반복하던 사이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삶을 원한다면 나의 역사를 뒤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건물도 짓기 전에 부수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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