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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서 Oct 23. 2021

퇴사하는 날 선임은 노하우를 달라고 했다.

이 바닥은 마지막까지 이래

바로 어제 있었던 근무를 끝으로 나는 퇴사했다.


말이 퇴사지 프리랜서에 인턴이라 사무실에 내 자리 하나 없었기에 짐 정리할 일도 없었다(늘 바리바리 싸들고 출근했고 퇴근할 때 다시 주섬주섬 챙겨 집으로 향했기에). 심지어 마지막 근무였던 금요일에는 재택근무를 했기 때문에 ‘내가 정말 퇴사하는 건가’하며 실감도 나지 않았다.


겨우 두 달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이쪽 바닥에서 두 달이나 인턴을 했다는 건 굉장히 오래 인턴을 한 축에 속한다. 원래는 기획기간인 1달 동안만 근무하는 줄로 알고 1달 뒤에는 다른 프로그램의 정식 직원으로 들어가야지 생각했지만, 자꾸 기한이 연장되는 바람에 이제야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두 달 동안 나와 함께 일했던 인턴들은 진작에 다른 프로그램으로 이직하였고 그 두 달 사이에 나는 왕 고참 인턴이 되어 새로운 인턴들에게 업무를 알려주고, 처음 하는 섭외 전화에 지레 겁을 먹은 새내기 인턴에게 ‘일주일만 지나 봐요. 00 씨 이제 자동응답기처럼 말할걸?’이라고 웃으며 격려가 섞인 농담을 던질 여유도 생겼다.


딱히 갈 곳도 정해지지 않은 내가 믿을 곳 하나 없는 똥 배짱으로 인턴을 그만둔 건 몇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 보람이 없었다. 기획단계의 프로라 방영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방송을 보고 ‘아 저거 내가 찾은 거지!’ 하거나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필 수 없었기에 일을 해도 계속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있던 프로에서는 빠르면 2주 뒤에 방영이 되었기 때문에 방송을 보면서 내가 찾은 자료가 나오거나 에피소드가 나오면 힘들어도 그때의 뿌듯함을 동기부여 삼았는데 이곳에서는 동기부여를 찾기 힘들었다(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프로도 아녔던지라).


그리고 사실 그동안 힘들어도 근무를 이어간 건 인턴 동기들 덕분이었다. 내가 이곳에 입사해서 가장 크게 얻어간 것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퇴사 후에도 종종 만나는 우리는 이제는 선임에게 불려 가 복도에서 일렬로 서서 꾸중을 들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자지러지게 웃는다. 혼날 일도 아니었고 잘못한 것도 아니라 단지 히스테릭한 선임 때문에 들었던 부당한 질책이어서 당시에는 얼굴이 새 빨게 질 정도로 화가 났었는데 이제는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이제는 의지하는 인턴들도 없고, 프로그램에 열의도 없고, 히스테릭한 선임을 감당하고 싶지 않고, 다른 프로그램으로 이직을 준비해야 했기에 2주 전 미리 양해를 구하고 퇴사를 준비했다. 퇴사일이 정해지자마자 이때다 싶었는지 업무가 3배로 늘었다. 퇴사한다니까 일을 바리바리 주는 것 같았다. 지독한 사람들.


그래도 끝이 있었기에 군말 없이 버텼고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다 보니 금요일이 찾아왔다. 전화가 울렸다. 프로그램 지원자 전화인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았는데 바로 윗 선임이었다(히스테릭 선임 말고).


“지서 씨 오늘 마지막 근무죠?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라는 수화기 너머의 소리에 그래도 마지막이라 전화를 해주는구나 싶어 괜스레 좀 찡했다. 그러나 곧.


“지서 씨가 그동안 서치해서 리스트업 한 섭외자들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그 노하우를 정리해서 인턴들한테 공유해줄 수 있어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이게 목적이었구나.’ 마지막까지 지독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사실 그동안 일적으로는 칭찬을 많이 받았기에 내가 그래도 일 좀 잘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래서 전화를 끊자마자 한컴을 켜서 노하우랄 것도 없지만 아는 대로 있는 대로 다 적어 내려 가다가 갑자기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일을 잘했으면 보상을 줬어야지. 그동안 양 적다고 퇴근해서도 닦달해서 밤새 일 시킬 때는 언제고. 알맹이만 쏙 빼가겠다 이건가’


지금까지 쓴 걸 다 지워버릴까 하나가 남겨진 인턴들 걱정에 ‘그래 까짓것 줘버리자 특별할 것도 없으니까’라며 글을 정리하고 인턴들에게 보냈다. 지금 보내는 양도 적다고 난리인데 이 와중에 퀄리티까지 떨어졌다가는 제2차 복도 소집이 발발할게 눈앞에 훤했다.


6시 정해진 근무가 끝이 났고 감사했다는 짧은 글을 끝으로 카톡방을 나왔다.


카톡방을 나옴으로써 그렇게 나는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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