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은 다들 자신처럼 요상한 인간들을 상대하며 적대심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지나가고 별난 인간들만 엉겨 붙어 다들 그렇게 지긋지긋한 이들을 상대하느라 온 에너지를 쏟고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잠이 든다고.
지속은 이 세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학원에 불을 지르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 때면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아 지속을 섭섭하게 했다. 세상아 사라질 생각이 없니? 그럼 좋아. 내가 눈을 떴을 때 십 년 후로 가줘. 지금보단 낫겠지. 28살의 지속이를 만난다면 쌍 따귀를 처 올리며 38살 지속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열심히 안 살고 망상에 젖어 소중한 시간을 써버린 너 때문에 내가 이렇다고 소리를 지를 텐데. 그건 가혹하니 넘어가고.
지속은 엉켜버린 인생의 실타래를 풀 노력 없이 싹둑 자를 가위를 주지 않는다고 투정만 부리고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원에서 원하던 공부를 했지만 돈과 시간만 버렸고 첫 연애에 성공했지만 뜨겁게 타오르지 않았으며 몇 번이고 삶을 리셋할 기회가 있었지만 언제나 고향 노처녀 원장 밑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래서였나. 과거 월급은 한 푼도 올려주지 않았지만 학원의 기둥으로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던 원장의 태도가 변했다. 병히와 대략적인 결혼 날짜를 잡자 원장은 본색을 드러냈다. 지속의 수업을 애매하게 빼버리는 걸로 빅엿의 시작을 알렸다. 차라리 첫 수업이나 끝수업이 빠지면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면 됐는데 중간 타임을 빼버리니 난감했다. 한 타임 수업료가 빠지는데 빈시간에 쉬는 것도 아니고 은근 전화받기 같은 잡일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만물을 사랑하는 연습 중이던 지속은 군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럴 때면 원장은 특유의 반달 눈웃음을 치며 수고 많은 지속쌤에게 결혼할 때 큰 선물을 해줘야죠 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원장에게 결혼할 때 큰 선물을 받긴 했다. 그녀는 6년 넘게 연차로는 8년을 자기 밑에서 일한 지속의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축의금도 냉장고도 없었다. 심지어 지속이 퇴사하기로 정해진 날보다 삼 개월이나 일찍 지속을 내쫓았다. 아.. 노처녀 원장에게 내쫓긴 이야기는 정말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평생 묻고 갈 수치스러운 기억이지만 지속은 솔직하니까.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다.
원장은 기둥서방이자 사업 파트너인 부원장 준식이 아빠를 등에 업고 지속에게 작정하고 덤볐다. 원장이 늘상 개판을 치고 관두는 강사를 보고 하는 말이 있었는데 우물에 침을 뱉고 떠나지 말라고. 관둔다고 자신에게 바닥을 보이지 말란 소리였다. 그런 원장이 결혼을 앞둔 지속에게 가래침을 뱉었다.
그날은 하늘이 높고 날이 유독 좋았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쿠폰 도장 열개와 바꾼 공짜 커피를 들고 상큼하게 사뿐사뿐 학원으로 들어서는 지속을 원장이 매섭게 불렀다.
"야 이지속 넌 내가 우습지? 너 이리 와 봐."
지속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엄마뻘 원장은 고상을 떨며 강사들에게 존대를 했는데 처음 들어본 반말에 지속이 놀라자 부원장이 원장을 말리는 척 억지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 지속은 무슨 날벼락인지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지속을 보곤 더 의기양양해져서
"부원장님 이거 놓으세요. 애들을 다 망쳐놓고 너 뭐하는 년이야? 누구 학원을 망하게 하려고! 어디 예전처럼 달려들어봐! 내가 너한테 또 당할 거 같아?"
지속은 망치다니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원장은 지속이 준비시킨 토셀 시험반 아이들이 기본적인 단어도 모른다고 지속에게 바락바락 소릴 질렀다. 지속은 눈치를 채고야 말았다. 첫 번째 원장은 지속에게 축의금을 주기 싫다. 두 번째 지난날 퇴직금을 사수하기 위해 자신을 비굴하게 만든 지속이 괘씸하다. 세 번째 지속은 고사장의 정체 및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네 번째 지속의 기를 퐉 죽이려면 궁지에 몰아넣을 학익진 전법뿐이다.
지속과 친분 없는 신참 강사들과 고사장을 옆에 두고 어깨를 쫙 펴고 선 원장의 모습은 마치 날개를 활짝 핀 학 같았다. 지속은 더 이상 원장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람과 싸우는 것에 지쳤다. 이미 싸울 대로 싸워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투견처럼 지속은 축 처진 어깨로 학원을 빠져나왔다. 지속의 뒤통수에 대고 여전히 악을 쓰는 원장과 말리는 시늉만 하던 부원장을 뒤로하고 내쫓긴 지속은 정처 없이 앞으로 앞으로 걷다, 멈춰 서 울다 다시 걸어 나갔다. 그렇게 노처녀 원장과의 악연은 끝났다. 잠시 너무도 분해 원장의 만행을 전단지에 적어 시내에 뿌릴까도 생각했다. 벌금을 맞던 전과자가 되던, 날 내던져 원장을 망칠 수만 있으면 그러겠다고. 그러다 정신을 차린 지속은 관뒀다. 원장을 저주라도 할까 했지만 그것도 관뒀다. 지속이 멈춰야만 이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그러고 2년 뒤 지속은 원장의 전화를 받았다. 번호를 지워 모르고 받았는데 뻔뻔한 원장은 살갑게 지속의 안부를 묻고 그때 그렇게 화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참을 걸 하면서 끝까지 미안하단 소린 없었다. 못 준 축의금을 준다고 계좌를 묻는데 쌍욕이 올라오는 걸 지속은 정신력으로 삼켰다. 꽉 채운 6년을 매달 월급 넣어주던 계좌를 묻는 꼴이라니. 지속이 아니라고 거절하자 원장은 갑자기 면접을 보러 온 지속은 알지도 못하는 강사를 한참 욕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원장은 한결같은 개년이었다. 지속은 원장의 번호를 차단하며 징글맞은 그 여자를 인생에서 지울 수가 있었다. 후에 듣기론 원장과 부원장이 싸우고 관계가 쫑났다고. 지속에게 전화를 건 것도 원장 블로그에 악플이 달려 지속이 쓴 것인지 떠보려 연락했음을 알음알음 알게 됐다.(지속 말고도 원장은 원한을 산 강사가 많다)
원장은 지금도 지속의 고향에서 여전히 학원을 운영하며 잘 먹고 잘살고 있다. 터미널을 지날 때마다 지속은 원장의 학원 간판을 올려다보며 혀를 끌끌 차곤 한다. 당신이 어른다운 어른이고 좋은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나도 당신을 정말 좋아했을 텐데, 삶에 귀인으로 남았을 텐데.
지속은 언제일지 모를 원장의 장례식을 기다린다. 그때가 오면 반짝반짝 별이 된 그녀를 위해 주고 싶은 큰 선물이 하나 있다.(눈웃음 찡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