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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an 22. 2023

설 쇠러 가는 일의 그 허무한 결말

해외생활을 오래 한 남편은  시간 동안 함께 하지 못한 부모님 기제사와 명절에 대한 기대감이 유독 커 보였다. 팬데믹때문에 귀국 후에도 여전히 참석을 못하다 보니 더 그래 보였다.


서울 우리 집에서 울산 큰집까지 자동차로 무려 11시간이나 걸린 작년 추석은 남편과 아빠의 마음을 알아서 나도 딸들도 11시간이 감내가 되었었다.

그런데 그때, 직감적으로 알았었다. '딸들은 다시는 안 가겠구나'라고.


말이 11시간이지 찔끔찔끔 움직이는 고속도로 위에서의 그 긴 시간은 딸들에게 명절에 이동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 혼란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고, 더구나 20대 중반을 넘긴 딸들이 내 집이 아닌 곳에서 북적이며 자는 일도 불편했을 것이 뻔했다. 어렸을 때의 큰집과는 달랐을 것이다.


엄마는 딸들의 편하지 않은 그 마음이 보였지만, 아빠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설 연휴가 가까운 어느 날, 두 딸이 이번에는 따라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큰딸은 회사일이 바빴어서 좀 쉬고 싶다고, 작은딸은 월말에 교수님과 세미나차 미국에 가야 해서 준비할 일이 있다고, 엄마가 듣기에는 타당해 보이는 이유였다.


딸들에게는 싫은 소리를 못 하는 남편이 괜히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엄마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것도 아니고 딸들까지 긴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 멀리 가야 하는 이유도, 불편하게 자야 하는 이유도 나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딸들을 설득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히려 아빠 생각을 따를까 봐 마음이 쓰였다.


이래서, 저래서 우리끼리만 다녀오자. 나도 사실 긴 시간 동안 차 타는 일이 부담이 되지만 나는 같이 가겠노라 말했지만 남편은 당최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한국을 떠났던 십여 년 전, 딸들이 초등학생이던 그때 그 상황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이 답답하기만 했다.


남자들 특유의 이해할 수 없는 유교적인 고집 때문에 며칠 동안 냉랭한 기운의 불편한 간을 보냈고, 설 연휴 시작일이 되었다. 독립해서 살고 있는 딸들이 자기들 표현대로 '본가'에 왔다.


딸들을 데리고 설을 쇠러 내려가고 싶은 아빠의 설득력 없는 설득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딸들의 논리력에 참패를 당하기 직전이 된 남편에게 딸들의 큰아빠로부터 연락이 왔다. 온 가족이 코로나 양성이라 이번 설에는 내려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두 딸의 논리력에 밀려서 패배 직전이었던 아빠는 예상치 못한 종전선언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설 쇠러 가는 일의 결말 나버렸다.



그리고,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종알종알 딸들 목소리가 조용했던 집을 따뜻하게 채웠고, 큰딸 회사에서 온 한우를 먹고, 작은딸 친구 부모님이 말려서 보낸 반건시 곶감과 큰딸이 사 온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며 진정한 '우리 가족'만의 설 연휴를 보내는 중이다. 동생이 언니 주차 연습을 시키고, 다 같이 영화를 보고, 설에 먹을 꼬치를 꿰고, 동그랑땡을 빚었다.


명절이 이런 것이 아닌가 말이다. 더 이상 남편의 형제들이 아닌 우리 넷이 함께하는 시간, 따로 사는 '우리 가족'이 모여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이것이 명절 아닌가!


올해는 차가 덜 막힌다며, 가지도 않을 울산 내려가는 도로 교통 상황을 살피는, 미련을 못 버리는 남편이 나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살아계셨으면 100살이 넘었을 우리 아빠보다 아직 예순도 안 된 남편이 왜 더 보수적이고 생각의 틀이 편협한 지 오늘도 나는 이해보다 포기를 선택하고 만다. 연휴 끝나고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자고 얘기하게 된다. 그곳은 겨우(?) 3시간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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