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을 오래 한 남편은 긴 시간 동안 함께 하지 못한 부모님 기제사와 명절에 대한 기대감이 유독 커 보였다. 팬데믹때문에 귀국 후에도 여전히 참석을 못하다 보니 더 그래 보였다.
서울 우리 집에서 울산 큰집까지 자동차로 무려 11시간이나 걸린 작년 추석은 남편과 아빠의 마음을 알아서 나도 딸들도 그 11시간이 감내가 되었었다.
그런데 그때, 직감적으로 알았었다. '딸들은 다시는 안 가겠구나'라고.
말이 11시간이지 찔끔찔끔 움직이는 고속도로 위에서의 그 긴 시간은 딸들에게 명절에 이동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 혼란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고, 더구나 20대 중반을 넘긴 딸들이 내 집이 아닌 곳에서 북적이며 자는 일도 불편했을 것이 뻔했다. 어렸을 때의 큰집과는 달랐을 것이다.
엄마는 딸들의 편하지 않은 그 마음이 보였지만, 아빠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설 연휴가 가까운 어느 날, 두 딸이이번에는따라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큰딸은 회사일이 바빴어서 좀 쉬고 싶다고, 작은딸은 월말에 교수님과세미나차 미국에 가야 해서 준비할 일이 있다고, 엄마가 듣기에는 타당해 보이는 이유였다.
딸들에게는 싫은 소리를 잘 못 하는 남편이 괜히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엄마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지않는다는이유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것도 아니고 딸들까지 긴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 멀리 가야 하는 이유도,불편하게 자야 하는 이유도 나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딸들을 설득하고 싶지가 않았다.오히려 아빠 생각을 따를까 봐 마음이 쓰였다.
이래서, 저래서 우리끼리만 다녀오자. 나도 사실 긴 시간 동안 차 타는 일이 부담이 되지만 나는 같이 가겠노라 말했지만 남편은 당최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한국을 떠났던 십여 년 전, 딸들이 초등학생이던 그때 그 상황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이 답답하기만 했다.
남자들 특유의 이해할 수 없는 유교적인 고집 때문에 며칠 동안 냉랭한 기운의 불편한 시간을 보냈고, 설 연휴 시작일이 되었다. 독립해서 살고 있는 딸들이 자기들 표현대로 '본가'에 왔다.
딸들을 데리고 설을 쇠러 내려가고 싶은 아빠의 설득력 없는 설득이 시작되었다.언제나 그랬듯이 딸들의 논리력에 참패를 당하기직전이 된 남편에게 딸들의 큰아빠로부터 연락이 왔다.온 가족이 코로나 양성이라 이번 설에는 내려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두 딸의 논리력에 밀려서 패배 직전이었던 아빠는 예상치 못한 종전선언을 들어야 했다.그렇게 허무하게 설 쇠러 가는 일의 결말이나버렸다.
그리고,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종알종알 딸들 목소리가 조용했던 집을 따뜻하게 채웠고, 큰딸 회사에서 온 한우를 먹고, 작은딸 친구 부모님이 말려서 보낸 반건시 곶감과 큰딸이 사 온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며 진정한 '우리 가족'만의 설 연휴를 보내는 중이다. 동생이 언니 주차 연습을 시키고, 다 같이 영화를 보고, 설에 먹을 꼬치를 꿰고, 동그랑땡을 빚었다.
명절이 이런 것이 아닌가 말이다.더 이상 남편의 형제들이 아닌 우리 넷이 함께하는 시간,따로 사는 '우리 가족'이 모여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이것이 명절 아닌가!
올해는 차가 덜 막힌다며, 가지도 않을 울산 내려가는 도로 교통 상황을 살피는, 미련을 못 버리는 남편이 나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살아계셨으면 100살이 넘었을 우리 아빠보다 아직 예순도 안 된 남편이 왜 더 보수적이고 생각의 틀이 편협한 지 오늘도 나는 이해보다 포기를 선택하고 만다. 연휴 끝나고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자고 얘기하게 된다.그곳은 겨우(?) 3시간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