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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Feb 17. 2023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의 비밀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리모컨을 이리저리 누르면서 괜한 TV와 실랑이 중이었다. TV를 보는 것인지 채널 개수를 확인하는 것인지 내 손은 리모컨만 붙잡고 지리한 밤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일찍 잠을 청했던 남편이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아차릴 목소리와 표정으로 "ㅇㅇ이가 초콜릿을 보냈네!"라며 잠이 덜 깨서 휘청거리며 말했다. '저렇게까지 기쁠까? 자다 말고 자랑을 하고 싶을 만큼 좋을까?' 그런 남편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고, 12시를 넘기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은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 '런타인데이'였다. 언젠가부터 친구, 연인, 가족에게 초콜릿 선물을 하며 마음을 표현하는 날이 된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초콜릿을 건넸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남편을 보면서 '그래, 내 생각이 맞았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념일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는 최소한의 축하와 기념만 하며 사는 편이다. 그 기념일에는 가족들 생일과 크리스마스 정도가 포함된다. 미역국을 먹고, 케이크 촛불을 부는 정도이다.

 '기념일이 뭐 대수라고. 건강하고 화목하게 하루하루 잘 지냈으면 됐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내 성향이 그렇다 보니 남편이 결혼기념일을 잊고 지나도 크게 서운하지 않다. 딸들이 가족 기념일을 잘 챙기고 있어서 나까지 나서지 않는 이유도 포함이다.


해마다 밸런타인데이를 잊지 않던 딸들이 올해는 초콜릿 얘기가 쑥 들어가서 내심 살짝 걱정이 되었다. 남자도 여자의 갱년기 증상과 비슷한 감정의 터널길을 지난다는 사실을 남편을 보면서 느끼는 중인데, 두 딸 중에 누구도 초콜릿 얘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딸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오는 길이 너무 막힌다며 언니네 오피스텔에서 자야겠다는 연락만 온 상태였다.


'어! 얘네들, 이러면 곤란한데.' 여자 셋만 있는 단톡방에 살짝 귀띔을 했다. 아빠가 딸들 초콜릿을 기다리는 눈치라고.

"나 너무 바쁜데 구매대행 해 줄 사람?" "오늘이 벌써 14일이야?" 두 딸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저녁시간이 지나서 밤이 되었고 남편은 별다른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괜히 내가 딸들에게 서운했다. 밸런타인데이가 뭐라고. 초콜릿 회사의 상술로 만들어진 날일 뿐인데.


나는 잊고 지날지라도 딸들까지 그러는 건 섭섭한 일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그런 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이러나 싶었지만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부터 아이 마음이 된다는 말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날도 잠도 안 자고 TV만 괴롭히고 있었는가 싶다.


다행히 밤 12시가 넘어가기 전에 큰딸의 카톡 선물이 자던 아빠를 깨웠고, 내가 받는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의 서운함도 달아났다.


실물 초콜릿도 아닌 대폰에 아직은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딸의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은 잠이 덜 깨서 비틀거리면서까지 자랑하고 싶은 아빠가 내심 기다렸던 딸의 마음이었다.



이틀 뒤에 실물 초콜릿을 받은 남편의 표정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 나도 초콜릿 줬잖아!" "잊었나 해서 섭섭했는데 바빠서 그랬구먼!" 와이프 얘기는 귀에도 안 들어오는지 박스만 풀면서 싱글벙글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감수성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는 그 남자가 나는 낯설었다.


그런데 남편모른다.

딸들은 바빴던 것이 아니라 그날이 그날인지도 몰랐고, 아빠를, 초콜릿을 떠올리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여러 모양의 초콜릿 가운데 빨간색 하트 초콜릿을 가장 먼저 집어서 입 안으로 넣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혼자 생각했다.

'얘들이 남자 친구가 없는 게 확실하구나. 밸런타인데이가 안중에 없는 걸 보면'


그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은 아빠만 모르는 비밀이, 엄마만 알아챈 딸들의 남친 유무의 비밀이 담긴 초콜릿이었다.

나는 내 눈에 가장 안 예쁜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었다. 왠지 먹어 치우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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