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노랑코끼리 이정아
Aug 01. 2022
넷플릭스 드라마나 보며 하릴없이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우리 부부였다. 독립한 지 1주일이 되어가는 작은 딸이 주말인데 집에 한번 들를까 싶어서 톡을 보내봤다.
싱크대 앞에서 요리를 하는 듯한 사진이 틱 올라왔다. 그 좁은 집에 친구들을 불러서 집들이라도 하나 싶어서 물어보려는데, 톡을 보낸 사람이 작은딸이 아니라 큰딸이란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언니가 찍은 동생 사진이었다. 언니가 동생네에 놀러 가 있었다.
큰딸은 강서구의 오피스텔에서, 작은딸은 신촌의 오피스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각각 살고 있다. 따로 살지 말고 적당한 위치에 집을 얻어서 둘이 같이 살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것도 단순한 엄마 생각이었다.
"같이 살 거면 집을 왜 나가?" 큰딸의 대답이었다. "언니랑 살면 내가 집안일 다 해야 할 게 뻔한데 내가 왜?" 작은딸의 대답이었다.
누가 들으면 엄청 사이 안 좋고, 자기만 아는 자매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 자매는 둘도 없이 친하고 가까운 사이이다. 친구가 필요 없을 정도이다.
이 자매는 아기 때부터 크게 싸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연년생이어서 책이며 장난감이며 학용품이며 늘 같이 사용했지만 서로 가지려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음식에 욕심도 안 부려서 서로 먹겠다고 악을 쓰는 일도 없었다.
1살 차이였지만 언니가 체격도 컸고, 마음도 넓었다. 욕심부리지 않고 동생에게 양보를 잘하다 보니 티격 거릴 일이 별로 안 생겼다. 자기도 아직 아가인데 언니라고 늘 큰 애 취급을 해도 동생에게 엄마 사랑을 뺏겼다고 질투도 안 하던 아이였다. 동생은 자기 눈에 작은 아가였고, 자기는 겨우 1살만 많다는 사실을 인지도 못하고 한참 어린 동생으로만 여기는 듯 보였다.
큰딸은 모든 것이 빨라서 키우는데 수월한 면이 많았다. 덕분에 동생은 글 읽기도 언니랑 놀면서 배웠고, 인형 놀이도, 자동차 놀이도, 블록 쌓기도 언니가 있어서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소극적인 언니에 비해 적극적이고 사교적이었던 동생은 언니 친구도 모두 자기 친구를 만들었다. 덕분에 자매는 늘 함께였다.
아토피 피부염이 심해서 6살이 되어도 유치원에 보내기가 겁났던 나는 동네 작은 선교원에 작은딸을 보냈었다. 혼자 보내 놓기가 안심이 안되어서 7살이나 먹은, 또래보다 머리가 하나 큰 언니도 같이 딸려 보냈다.
착했던 언니는 동생이 아프니까 당연히 자기가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쉽게 받아들여줬다. 언니의 양보와 희생이 자매 간의 사이를 좋게 만든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자라면서 좀 달라질 줄 알았더니 사춘기 이후로 자매는 더 친해진 듯 보였다. 살갑게 감정 표현은 안 했지만 서로 위하는 마음도 보였고, 한 방에서 지내면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낯선 나라 인도에서의 중고등 시절에는 더 없는 의지가 되어 주었다. 인도 집은 방도 많았지만 침대방, 공부방을 나눠서 함께 자고, 함께 공부했다.
엄마 눈에는 늘 양보만 하는 착한 언니, 실속은 챙기지만 언니에게 의지를 많이 하는 동생으로 보이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둘만 아는 것이니 그 진실은 모르겠고, 사이좋게 지내는 자매가 보기 좋고 안심이 되는 건 사실이다. 나도 자매가 많지만 어떻게 큰소리 한번 안 내고 저렇게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언니가 미국 유학을 가면서 그때부터는 오히려 동생이 언니처럼 굴었다. 미국에서 혹시나 언니가 새로운 문화에 정신을 못 차리고 일탈이나 하지 않을까 수시로 체크하는 동생이었다. 언니의 유학에 자기는 유학도 양보했지만 그것으로 크게 불만을 말하지도 않았다. 엄마보다 자매끼리 더 자주 소통을 하면서 미국 유학 4년을 무사히 마치고 큰딸은 동생이 있는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자매는 20대 중반이 되었고, 여전히 친한 친구였다. 엄마는 모르는 둘만 아는 서로의 얘기가 있었고, 기념일이나 가족 여행 계획을 둘이서 의논해서 준비하곤 했다. 직장인 언니보다 학교 다니며 프리랜서로 일하는 동생이 세금을 덜 내서인지 실수입이 더 많은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그렇다고 돈을 더 써도 되는 이유는 안 될 것 같은데 언니보다 돈을 더 쓰는 일이 생겨도 크게 불만이 없어 보였다. 언니가 독립할 때 부족했던 보증금도 동생이 척척 빌려줬다.
어릴 때 양보만 받고, 도움만 받던 동생이 커서는 언니에게 유학도 양보하고, 금전적인 도움도 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 모습에 엄마는 또 흐뭇하고 감사했다.
우리 집 자매는 사이가 좋다. 이유가 뭐든 간에 엄마 눈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감사한 일이다. 외동도 많고, 남매, 형제도 많지만 얘들은 자매이다. 자매만이 가질 수 있는 관계성에서 오는 특권을 누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자매가 많아서 아는 얘기이다. 결혼 후에도 이 자매는 사이가 좋을 것으로 믿는다. 그때도 여전히 친구일 것이고, 서로 의지하는 관계일 것이다. 물리적인 의지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정서적인 의지가 분명히 될 것으로 믿는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바란다'는 엄마의 간곡한 표현이다.
딸들아. 너희는 모를 거야. 엄마가 너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줬는지. 언니가 있고, 여동생이 있는 자매 관계가 얼마나 큰 선물 보따리인지. 그것도 1살 차이. 엄마, 아빠가 물려줄 건 많이 없지만 언니, 동생을 만들어 준 것으로 많은 걸 줬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 선물, 망가뜨리지 말고 소중하게 아끼며 살기 바라.
집에서 동생이 해 주는 밥을 먹고, 보기만 해도 입 안이 달달한 홍대의 어느 카페의 음료 사진을 언니가 또 보냈다. 별것 아닌 사진에 엄마는 또 흐뭇해졌다.
가족 톡방의 화려한 플레이팅 음료 사진에 조용히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 자매의 시간을 나도 공유하고 싶었다.
'딸들아. 엄마에게 감사하여라'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음료 사진을 보며 자매의 엄마는 혼자서 읊조린다. 연년생 딸 둘을 낳은 나 자신을 셀프 칭찬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