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에는 죽은 강낭콩 화분이 두 개 있다. 5월에 과학 '식물의 한살이' 단원을 배우면서 들여다 놓은 것인데, 싹이 나오다 말고 시들었다. 죽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짐작된다. 기본적인 생육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도 충분히 주었고, 햇빛도 잘 들었으며, 좋은 흙을 썼다. 화분 크기도 작지 않다.
다년간 강낭콩을 키워 본 나로서는(주말 농장에서 콩 농사도 짓는다) 콩이 자라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싹은 고개를 들자마자 죽었다. 필히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싹을 쪼물락 거렸다거나, 싹을 들었다 놓았다거나, 싹을 잘랐다거나. 초등학교 교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잔인한 호기심이겠지. 교실은 어떤 의미에서 위험한 공간이다. 살아있는 존재가 감지되면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그 무엇도 '만짐 당함'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번 꺾인 강낭콩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밭에도 그런 녀석들이 있다. 한 이랑에 똑같은 간격으로, 똑같은 종묘사에서 구입한 씨앗을 심어도 어떤 녀석은 잘 자라고 어떤 녀석은 죽는다. 죽은 녀석은 아무리 기다리고 지켜보아도 살아나지 않는다. 나는 화분을 비워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두 화분 사이에 놓인 페트병 하나가 나를 가로막았다.
강낭콩 주는 물, 페트병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본래의 라벨을 떼어내고 연습장에 색연필로 진하게 쓴 글씨였다. 그러고 보니 강낭콩 화분의 흙도 촉촉하게 젖어 진한 갈색을 띠었다. 싹이 죽은 지 삼 주가 지났건만 아직도 누가 계속 물을 주며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소문을 했다. 강낭콩을 돌보는 사람은 예빈이었다.
"예빈아, 미안한 말인데 이제 강낭콩이 살아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저도 그럴 것 같기는 한데, 계속 줘 봤어요. 기다리는 재미도 있고 해서."
이것 참 난감하다. 예빈이에게 강낭콩 화분은 희망 혹은 기대의 관점에서 아직 유효한 기능을 하고 있다. 강낭콩이 죽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을 쏟는 대상으로서 교실 뒤편에 화분 하나쯤이 있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나도 가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웃겼던 일화를 떠올린다. 예전에 키웠던 노돌이, 노순이라는 강아지들도 기억난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고, 실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냥 내 의식 안에서 기억의 형태로 혹은 감정을 부여할 대상으로 있기만 해도 괜찮다.
예빈이에게 강낭콩은 어떤 의미로 자리 잡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함부로 치워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놓아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동안 강낭콩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