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학교의 맛

좀 심심한 방학

21.07.20

by 이준수

나의 일 년은 크게 4조각으로 자를 수 있다. 1학기, 여름방학, 2학기, 겨울방학. 조각의 크기만으로 보면 1학기와 2학기가 크지만 개인적 중요도는 방학을 따를 수 없다. 송편의 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합창 파트, 식혜의 다디단 마지막 한 모금. 나는 여러 것들에서 방학의 이미지를 본다.


이제 나는 낮 시간에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끌 수 있고, 요일을 체크하지 않아도 된다.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거나 화장실 가는 횟수를 세지 않아도 된다. 면도를 며칠 건너뛰어도, 셔츠를 입지 않아도 괜찮다. 쌓아둔 책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한 권, 한 권 차분히 읽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나는 구미가 당기는 책이 보이면 일단 사 두었다가 기회가 될 때 펼쳐보는 편이다. 그러나 직장에 얽매여 사는 인생이 보통 그러하듯 구미는 자주 당기고 기회는 적다. 그런고로 책은 부채처럼 늘어난다. 막상 방학이 되면 바다에서 헤엄치고 노느라, 네다섯 권 보다가 끝나기 일쑤라 책은 쉬 줄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그 몇 권의 책을 진득이 앉아 있는 날들을 진통제 삼아 산다.


뻔뻔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진짜 삶은 일을 하지 않을 때 살아지는 것 같다. 재미가 있으려면 밥벌이가 걸려있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학교가 좋은 곳이어도, 가르치는 게 좋아도 일은 일이다. 일은 고된 것이다. 나는 여름 방학 숙제를 일기(중간에 며칠 빠져도 오케이)와 독서감상문(일주일에 한 편 이상)만 내주었다. 어떤 선생님은 아이들이 풀어지니 숙제를 왕창 내주라고 했다. 나는 그 선생님이 주신 기나긴 숙제 목록을 선택 과제로만 내어 주고 강제하지 않았다.


나는 방학이 좀 심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릇이 비어있어야 국도 담고, 팥빙수도 담지. 애매하게 밥을 남겨 놓으면 먹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세월만 흐른다는 게 나의 방학론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두 도시의 백신 독려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