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외벌이 가정의 주부. 푼돈까지 물 샐 틈 없이 꼭꼭 틀어 막는 것이 나의 주요 과업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어제 새벽 두 시까지 영화 '악인전'을 보고 늘어지게 잤다. 아홉 시가 넘어 디지털 도어락 해제 소리에 눈을 떴다. 부지런한 아내가 큰 아이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1인 두 개 한정으로 팔도 비빔장을 반값에 팔더라고!"
아내는 장바구니를 내려놓으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 최다혜 씨는 '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다. 하루에 한 끼는 면을 먹어주어야 일상을 보냈다는 감각이 든다나. 면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밥이지, 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특이한 식성이다.
아마 팔도 시그니쳐 비빔장을 보자마자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을 것이다. 정가로 팔아도 쟁여놓을 아이템인데, 세일 표시까지 되어 있었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두 개를 집었을 공산이 크다. 치킨 대신 비빔국수를 먹는 사람이니 이해는 간다.
새우볶음밥으로 속을 채운 오므라이스로 아침을 먹었다. 디저트는 뜨레쥬르 유미의 세포 크림 도넛과 플레인 요거트에 망고를 썰어 넣어 즐겼다. 주말에는 두 끼만 먹기 때문에 아점을 꽤 넉넉히, 신경 써서 먹는다. 나는 그래도 입이 심심해서 스타벅스 카티카티 블렌드 원두를 갈아서 드립을 내려 마셨다. 그냥 마시기에는 무언가 텁텁한 맛이라 얼음을 채워 차갑게 만들었다. 자몽 향이 살짝 올라와서 훨씬 나았다. 그래도 다음 원두는 산토리니나 테라로사에서 가져오리라고 굳게 결심했다. 스타벅스 원두는 강릉의 숙련된 매장 로스팅 원두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오전 기온이 34도에 육박하는 날씨였지만, 집은 시원하다. 부엌 창과 거실 창을 열어 맞바람이 치도록 하면 선풍기만 돌려도 선선하다. 안방은 베란다와 드레스룸 창만 바람이 통하게 해도 바람이 잘 통한다. 밤에는 약간 싸늘해서 이불을 덮고 잔다. 오랜 만에 트렌디한 미국 포크송을 틀었다. 만족스러운 일요일 아침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가계부를 쓰던 아내가 펜을 탁 소리나게 내리쳤다.
"자기야, 하나로 마트 앱 켜서 영수증 좀 보여줘."
하나로 마트는 내 아이디로 적립을 하고 있어서 내가 번거롭게 접속해서 확인을 해야 한다. 하나로 마트 앱으로는 영수증을 확인할 수 없어서, 농협몰로 들어가서 하나로 마트 앱과는 다른 계정으로 모바일 영수증을 열어야 하는 참으로 성가신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연 23,060원이 찍혀 있었다.
"팔도만능비빔장 시그니처(튜브) 두 개에 8,160원! 할인 적용이 안 됐어. 으으."
아내는 즉각 하나로 마트에 전화를 걸었다. 여차저차 설명을 하더니 이내 '네네' 하고 공손히 전화를 끊었다. 해당 제품은 농협이나 신한, 삼성 등 신용 카드로 결제를 해야만 할인 적용이 되는데 아내는 '강릉 페이'와 연동된 '코나 카드(30만원까지 10% 할인혜택)'으로 값을 치뤘던 것이다.
나는 할인을 받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적립 계정이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트까지는 우리 집 현관에서 마트 입구까지 도어 투 도어 7분. 먼 거리는 아니지만 햇살이 화살처럼 내 살을 파고 들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미리 전화를 걸어둔 탓인지, 서비스 담당 직원 분이 아는 체를 하셨다.
"환불 도와드리면 되죠? 카드 주시겠어요?"
아차! 아내는 아내의 코나 카드로 결제를 했고, 나는 나의 코나 카드를 가지고 왔다. 교환도 환불도 먼저 결제한 카드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도로 집에 갔다. 아내에게 얼른 카드를 건네 받고 다시 마트로 향했다.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나는 금방 신한 카드로 재결제를 할 수 있었다.
"고객님 다 처리 되었습니다. 영수증 드릴게요."
흠, 더웠지만 모두 끝났군! 하면서 한 숨을 돌리려 하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팔도만능비빔장 시그니처 두 개에 5960원으로 2200원만 할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아내는 집에서 비빔장이 반값이라고 했다. 아내의 말이 맞다면 8160원의 절반인 4080원이 영수증에 찍혀 있어야 맞다. 비빔장 두 개 중 하나만 할인이 적용 되었구나! 나는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죄송한데 2200원 만 할인이 되었네요."
그러자, "네, 정확히 할인 다 되었습니다"하고 확신과 행복에 겨운 미소가 되돌아왔다.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일단 "아녜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씀드린 후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직접 판매중인 비빔장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아, 나는 매대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카드할인 1100원이 선명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면 비빔장 두 개의 할인액은 2200원이다. 점원 분은 신속하고 틀림 없이 계산해 주셨다. 아내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던 걸까. 사랑하는 비빔장이 할인한다는 사실만으로 짜릿하게 기뻐서 손을 뻗었던 걸까.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머! 내가 숫자를 잘못 봤네."
이번 해프닝은 아내가 면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 2980원을 2080원으로 오인한 것과 카드 할인 대상 브랜드를 점검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미안해 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억울해했다.
아, 면을 사랑해서 면을 비비는 비빔장마저 사랑하는 바람에 벌어진 면인상열지사를 어찌 몰아세우겠는가. 나는 비빔국수 맛있게 먹으라며 축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