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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Sep 25. 2018

체온계 렌즈필터는 넉넉히

18.09.25

동해로 돌아온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설 전날 밤은 부끄러워 죽을 뻔했다. 이게 모두 브라운 체온계 렌즈필터 때문이다

23일 날 저녁에도 연재 이마가 뜨거웠다, 아니 뜨거운 것 같았다. 다혜가 둘째 이마를 손으로 짚고는 인상을 구겼다. 그걸 보고 나도 짚어 보았는데 따뜻한 것 같아서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한테도 짚어보라고 권했다. 엄마는 손바닥을 손녀 이마에 대어 보시더니 본인 이마와 번갈아 비교한 후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미열이 있는 듯 하다는 아리송한 총평이 뒤따랐다.

온 가족이 손바닥 온도 지각 세포에 의지해 연재 열을 재는 동안 브라운 체온계는 놀고 있었다. 분명 체온계는 짐보따리를 풀었을 때 쓸만했다. 적어도 연재가 렌즈 캡을 잘근잘근 씹어 비닐 쪼가리로 만들어 버리기 전까지는 확실히 쓸만했다. 따스하다 정도였던 연재 몸은 의혹의 물결을 타고 급성 고열로 급히 추정되었고, 밤 8시 30분인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혹시 몰라서 사온 부르펜 시럽을 캐리어에 던져버리고 울산 대학병원 소아과 응급병동으로 차 핸들을 과격하게 돌렸다.

헐레벌떡 내려 접수하고, 연재 차례를 기다렸다. 대기 시간이 길어 체온부터 재기로 했는데 37.5도 였다. 어, 아까 분명 38도는 되는 것 같았는데. 뻘쭘해서 연재가 평소 열이 갑자기 오르는 일이 잦고 중이염이 자주 왔다는 둥 불필요한 정보를 바쁜 의사 선생님께 떠벌렸다. 연재가 방긋방긋 웃었다. 15분 뒤 초진 의사가 귀 관찰 도구를 지참하고 귀 상태를 확인하고 체온을 쟀다. 37.0도 그리고 귀는 괜찮았다. 의사 선생님이 다행이니  접수 취소를 해주겠다고 해서 공짜로 병원을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슈베르트 마왕을 틀었다.

브라운 체온계 렌즈필터 여유분은 필수라고 백
번씩 속으로 반복했다.


#대학병원야간응급약국에브라운체온계렌즈필터따위는팔지않음#선생님수업중에하얀분필팔생각없냐고묻는철부지된기분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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