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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Oct 04. 2018

그저 잘 살아있기만 하여라

18.10.04

아침을 먹다가 어제 장미공원에서 본 건O 생각이 났다. 건O는 3년 전에 진주초에서 가르친 제자인데 지금은 중학교 1학년이다. 연우 킥보드를 태우느라 자전거 길 따라 가고 있었는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검은 물체가 아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떤 개념 없는 놈이 전동 킥보드를 여기서 타지?'


순간 화가 나서 고개를 휙 돌렸는데 키가 상상 속 이미지와 달리 훌쩍 크긴 했어도, 확실히 건O이었다. 뽀얀 피부와 깔끔한 옷차림, 완전한 안전장비. 건O를 설명하는 키워드와 딱딱 들어맞았다. 건O 뒤로 속도를 약간 늦춘 학생이 한 명 더 지나갔는데 같은 가르쳤던 준호였다. 준호는 인사를 꾸벅했다.


변한 게 없었다. 준호는 흔히 말하는 모범생이라 입댈 것도 없고 알아서 뭐든지 잘 했다. 반면 건O는 늘 수업 시간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있고 질문을 하면 배실배실 웃었다. 부잣집 막내 도련님 같은 건O는 담임이 답답할 지언정 개인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아이였다. 나는 수업 시간에 수백 번도 더 자주 건O 곁에 가서 의자를 똑바로 밀어주고, 놓친 교과서 대목을 손가락으로 짚어주었다. 건O 입장에서는 귀찮고 싫었겠지만, 선생님 역할을 할 때의 나는 의욕없이 멍한 제자의 모습을 차마 내버려두기 힘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반대편으로 달리는 건O와 준호를 만났다. 준호는 또 인사했지만, 건O는 외면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3년 전에는 '지오메트리 대시'라는 게임을 엄청 좋아해서 그 게임 얘기 할 때만은 행복하게 수다를 떨었는데 요즘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가족의 사랑을 엄청 가득 받으며 사는 아이라서 내면이 무너지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세계가 강하지만 착한 건O, 똘똘한 준호. 제자들아 삶에는 목적과 수단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그저 잘 살아 있기만 하여라. 오며가며 마주치면 인사라도 하게. 그래도 건O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철지난 담임의 욕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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