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학교의 맛

부산 상회 아저씨, 걱정마세요 K주무관이 있어요

20.05.11

by 이준수


우리 학교에 '부산 상회 장학금'이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다. 부산하고 한참 떨어진 삼척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진 건 올 초의 일이었다. 교육복지사님이 연락을 주셨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없었다.


"선생님 반 학생 한 명이 부산 상회 장학금 대상자에 선정되으니 가정에 연락 넣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은 했지만 학교를 옮긴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부산 상회는 뭐고, 연락은 또 어떤 류의 연락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복지사님이 바쁘신 것 같아 동료 선생님께 물어물어 정체를 캐 보았다. 예전에 그러니까 30년도 더 전에 부산서 온 사람이 출신지를 따서 상회를 차렸다. 사업 수완이 좋았는지 부산 상회는 제법 큰돈을 만졌다. 그런데 당시 정라동이 어떤 동네냐 하면 가자미 말리고, 명태 잡아 입에 풀칠하는 주민이 다수였다. 부산 상회 주인은 학교에 거금을 의탁하며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는데, 사장의 자녀 또한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현재까지 장학사업을 유지하고 있다는 미담.


체온이 1도 상승한 채로 우리 반 A집에 전화를 걸었다. 120만 원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해 주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노트북이 한 대 뿐이라 중학교 형이 공부하는데 쓰고, 막내 녀석은 수업 내내 작은 휴대폰에 머리를 박고 있다고 말끝을 흐리셨다. 온라인 수업이 한 달 하고 말 것도 아니니 노트북을 구입해 드리마 약속드렸다. 용산에서 부품 떼서 PC 조립하던 경험을 살려 모델 리스트를 뽑았다.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겨우 하나를 골라 교육복지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조달청 또는 지역 전자 마트에서 판매하는 모델만 가능하니 내가 고른 제품을 구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삼십 분이 허무로 사라졌다. 더 나쁜 소식은 예산 집행을 당장 할 수 없어서 구입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김이 샜지만, 잠시 잊고 지냈다.


그러다 오늘, 수업 영상을 찍는데 누가 앞문을 두드렸다. 행정실 K 주무관이었다. 본관에서 우리 교실까지 5분은 걸어야 하는데 사전 쪽지도 없이 무슨 일일까. K주무관은 수업 중이신데 방해해서 죄송하다며 머쓱한 표정이었다. 표정과 달리 손에 쥔 종이는 단호한 기색이었다. 부산 상회 노트북 건을 의논하러 왔다고 했다. 노트북 구매는 학교와 계약 맺은 업체를 통하게 되어있는데, 1차로 제안받은 모델이 영 마뜩잖다며 콧등을 긁었다. 논란의 견적서를 같이 들여다봤는데 어느새 나도 귓불을 만지고 있었다. 우리는 곧 의기투합했다. 수정 희망 사항은 3군데.


1) 윈도우 10 프로 -> 아이가 가정에서 학습용으로 쓰기에 과하고 정품 기준으로 20만 원이나 잡아먹는다.

2) SSD 128GB -> 부팅용으로 쓰려해도 턱없이 부족한 용량이다. 대안으로 기타 프로그램을 하드디스크에 깔면 되나 아이가 일일이 드라이브 폴더 설정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3) 램 8G -> 64비트 운영체제 윈도우를 쓰면서 굳이 8기가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처음 살 때 16기가로 바로 가자.


K 주무관님은 업체에 전화를 걸어 딜을 시도하셨다. 학교 보급용이 아니고 아이 장학금 대상 물품이며, 어려운 집인 만큼 오래도록 쾌적하게 쓸 수 있어야 하므로 가성비를 최대한 뽑아달라. 그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쁜 일과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부러 교실까지 찾아오는 사람이라니. 누가 공무원 무사안일하대! 몇 시간 뒤 K 주무관이 돌아왔다. 자기가 선물 타는 아이인 양 싱글벙글 웃으며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새로 견적 뽑은 거예요. SSD도 256GB M.2 얄싹한 걸로 들어갔고, 윈도우 10 홈 버전으로 내리고, 램은 16기가. 이 정도면 5년 쓰겠죠?"


전문가인 본인이 단독으로 해도 되는데, 내가 담임이라고 또 확인차 오신 거다. 충분하다고, 이러면 애가 얼마나 잘 쓰겠냐고 감사의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우리 둘 다 그래픽 카드는 애 게임 캐릭터 레벨만 올릴 게 뻔하니 빼길 잘했다고 입을 모았다. 부산 상회 주인아저씨가 하늘에서 K주무관을 봤다면 뽀뽀라도 해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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