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 명동성당 꼭대기의 은은한 달빛 시계가 정각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 위의 달도 아홉 시에 별들과 만나기로 한 좌표에 도착해 있다. 밤의 농익은 어둠이 거리에 쌓여가는 중이다. 오늘밤은 바람이 좀 차가웠다. 갑자기 수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야, 어디야? 누나 잘 만났냐?"
"어. 좀 아까 헤어졌어."
그에게서 몇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은 내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보려는 그의 몸짓이었다.
"나 나갈까? 술이나 마실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술이나 사라. 오늘 같은 날 네가 한 턱 쏴야지? 입 쓱 닦으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것은 다음으로 미뤘다. 집에 가서 자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피곤하구나? 그럼 내일 이야기하고 오늘은 들어가서 얼른 자라."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보고는 싶은데 왠지 지금 보면 허튼소리만 늘어놓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어디로 걷는지도 모르고 계속 걸었다.
누나와 나는 다섯 시간이 넘도록 꼬박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다섯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떨어져 지낸 긴 세월로 인해 누나와 나 사이엔 거대한 심연 같은 것이 가로놓여 있었다. 암흑과도 같은 심연이었다. 그것을 고작 다섯 시간 만에 건너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시도였다. 십수 년만이라고 해서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낸 것도 아니었다. 잘 말하다가도 갑작스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보다 앞서는 감정 때문에 말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가슴이 벅차서 말에 소리가 실리지 않았다. 못다 한 말들이 집채만큼 쌓여 있는데도 자꾸 언어가 동이 났다.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누나의 눈에도 차마 말로는 못할 감정들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은 끝끝내 말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누나는 얼굴이 좋아 보였다. 이를테면 고달픈 인생살이에 일찌감치 생기를 다 소진한 사람의 얼굴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면 누나가 그만큼 강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나는 누나가 결혼을 했고 직장에 다니며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왠지 누나는 예술가나 학자, 혹은 수녀 같은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크게 놀라게 한 것은 누나를 다시 만났다는 기쁨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기뻤고 그 기쁨에 놀랐다. 누나를 만났다는 사실이 그렇게 즉각적인 기쁨을 주리란 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까진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로 알았다.
그런데 나는 결국 누나에게 아무런 진실도, 비밀도 털어놓지 못했다. 또박또박 읊어 주리라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어쩌면 처음부터 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에 일부러 더 단단히 다짐을 했던 건지도. 내가 고백한 거라곤 피부색이 다른 양부모 밑에서 홀로 자란, 어느 입양아의 조금 쓸쓸한 성장기에 불과했다. 결국엔 누나에게도 수호가 알고 있는 정도밖에 털어놓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빈약하고 부실한 이야기였다. 살과 지느러미, 아가미와 내장들은 모두 냉동실에 꽁꽁 감춰져 있었다. 나는 생선의 참모습을 본 적 없는 누나에게, 생선뼈를 생선이라고 속이고 나의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는 잡을 수 없는 버스가 되어 버렸다. 이제 버스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건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오늘이라면 가능했다. 오늘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털어놓아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럼 누나는 크게 상처를 입겠지만 그렇게 서로 비긴 셈 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 기회라는 것은 없다. 그건 누나와 내가 화해의 포옹을 나누기 전에 들추어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미 모든 빚과 계산을 청산한 사람들 같았다. 밀린 과거사를 다 교류하고 정리한 후 후련해진 사람들처럼 헤어졌다. 이래놓고 다음에 만나서 내 가슴속에 덩그마니 남아 있는 상흔들에 대해 뒤늦은 고백을 한다? 그럴 수는 없다. 그건 영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처음에, 아직 우리의 관계가 원위치되기 전에 했어야만 한다. 적어도 나란 사람에겐 그렇다. 나는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멍청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핑계일 뿐이지만 막상 누나를 보니 그런 것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자신이 없었다. 충분히 그래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생각일 뿐 나는 누구의 마음도 아프게 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놓고 늘 돌아서서 후회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면 그것은 전혀 해소되지 못한 채 내 안에 고스란히 켜켜이 쌓여갔다.
나는 누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 계속 보는 거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누나가 나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었다. 누나가 내게 사정해야 할 일이었다.
"만일 네 얼굴을 이렇게 한 번 보는 것으로 끝이라면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일 거야. 어차피 나는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이고 그저 네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부탁이야. 우리 이제 헤어지지 말자. 응?"
그래도 누나의 대답은 나 스스로 실추시킨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었다. 나의 입장이야 물어보나 마나였다. 설마 나 같은 놈이 매정하게 그 자리에서 한 번 보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내 진심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누나를 되찾고픈 마음이야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두 번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내 삶에 꽁꽁 묶어두고 싶을 정도였다. 그것은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제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야. 아무 데도 갈 생각하지 마."
내 말을 듣고 누나는 죽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나를 끌어안고 고맙다는 말을 열 번쯤 했다. 이제 우리에겐 천천히, 혹은 최대한 빨리 옛날의 오누이로 돌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