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19
스트레이는 자신이 십대 후반에 노숙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집세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해 차에서 지내며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기 시작한 것이 만 열아홉 살 때였다는 뜻이다. 본격적으로 길에서 지내며 미국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었던 2009년 초여름이다.
스트레이와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스트레이의 이야기들을, 특히 노숙하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거짓말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극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만큼 낯설었기 때문이다. 같은 미국인들 중에도 스트레이의 이야기를 놀랍다고 느끼는 사람은 적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한국 문화 속에서 평생 살아온 내게는 다른 차원으로 낯설다.
- 아니,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야. 대부분은 그런 생활이 존재한다는 걸 전혀 몰라.
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스트레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할 뿐이다.
서울에서 별다른 굴곡 없는 삶을 살아온 내게 ‘노숙인’, 더 익숙한 말로 하면 ‘노숙자’의 이미지는 한 가지다. 90년대 말 IMF 사태를 기점으로 급격히 늘어난, 서울역이나 그 주변 지하철역에서 종이박스를 깔고 누워 소주를 마시는 중년 남성. 이것이 현실의 일부만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안다. 굳이 미국까지 가지 않아도, 서울이라는 좁고 동질적인 지역 내에서도 실제 노숙의 형태는 그보다 훨씬 다양하다. 하지만 이미지는 지식보다 훨씬 강력하다.
아마 스트레이가 노숙 중 시카고에 머물렀을 때는, 나이가 어리다는 점만 빼면 내 머릿속에 있는 서울의 노숙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트레이의 노숙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화물열차에 숨어 타거나 히치하이킹을 하며 미국 전국을 떠도는 행위였다. 이것은 단순히 노숙이라는 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소위 무전여행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일반적인 무전여행과 크게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돌아갈 집이 없기 때문에 여행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념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상당히 많은 젊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당시의 스트레이와 같은 방식으로 노숙을 한다. 드넓은 미국 땅을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니고, 전국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정치적인 행사와 공연에 참석하며 다른 젊은 무정부주의자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들끼리 이룬 느슨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인 듯하다. 당시 스트레이도 신념에 찬 무정부주의자였다. 노숙 자체를 시작한 이유는 이념보다는 가난이었다. 그러나 노숙의 여러 방식 중에서 그 방식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념이었다.
페이스북을 보면 스트레이가 화물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떠나기로 처음 결심한 것은 2009년 4월이었다. 차를 팔고 무정부주의 코뮌에 들어가기 전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완전히 길바닥에 나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집은 없는 상태였다. 어차피 머물 곳이 없다면 최대한 많은 곳에 가 보자는 생각이었다고 스트레이는 말한 적이 있다. 갈 곳이 없는 처지가 되지 않았더라도 화물열차를 탔을지 내가 물었을 때, 스트레이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었다.
스트레이는 아마도 같은 달에 처음 화물열차를 타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듯하다. 열차에 타려다가 들켰고, 직원이 쫓아오는 바람에 도망쳤다는 글이 페이스북에 남아 있다.
스트레이가 처음으로 화물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떠나는 데에 성공한 것은 같은 해 6월이었다. 멈춰 있는 열차를 발견하고 무작정 올라탄 후 아이오와 주의 허허벌판에 내리게 됐다. 일리노이 주의 바로 옆 서북쪽에 있는 아이오와 주는 원래 스트레이가 가고 싶었던 곳은 아니었다. 처음이었기 때문에 요령이 없었지만, 요령이 있었다고 해도 행선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멈춰 있거나 느리게 달리는 열차가 있으면 일단 타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허허벌판에서 금세 다른 열차를 타고 교통량이 더 많은 아이오와 시티로 갈 수 있었다.
9일 동안 화물열차를 옮겨 타고 히치하이킹을 한 스트레이는 네브래스카 주, 콜로라도 주, 유타 주를 거쳐 서쪽으로 쭉 갔다. 그리고 목적지인 캘리포니아 주에 무사히 도착했다. 원래 그곳에서 히치하이킹을 해서 시카고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정치 토론 모임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대신 화물열차를 타고 북쪽의 오리건 주로 갔다. 그 다음은 동쪽으로 달려 와이오밍 주, 그리고 다시 콜로라도 주를 거쳐 시카고로 돌아왔다. 다 합쳐서 한두 달 걸렸다.
경험을 쌓으면서 스트레이는 점점 능숙해졌다.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는 데에 필요한 날쌘 다리와 튼튼한 상체도 갖추고 있었다. 취해 있을 때에나 다쳤을 때에도 빠른 속력의 열차에 뛰어 올라타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첫 여행을 마치고 시카고에 돌아온 지 열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스트레이는 다시 훌쩍 떠났다. 동북쪽에 있는 미시간 주의 앤아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술에 취한 채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테네시 주의 내쉬빌이나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 또는 뉴욕 주의 버팔로에 들렀다 가고 싶었지만 열차는 스트레이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로 향했다. 그래도 콜럼버스에서 5일 동안 다시 화물열차를 타고 히치하이킹을 해서 앤아버에 도착했다. 당시 스트레이는 시카고에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고, 여러 지역에 갔다가 생일이 있는 가을에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시카고에서 한 달 정도 지낸 후 스트레이는 겨울에 대비해 남쪽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11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화물열차를 타는 대신 남의 차를 얻어 탔다. 다만 태워 줄 사람을 구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여름에 시원한 지역, 겨울에 따뜻한 지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미국처럼 땅덩이가 큰 나라를 떠도는 일의 장점 중 하나였다. 스트레이는 시카고에서 겨울을 나는 일을 가능한 한 피했다. 가을에 있는 생일을 끼고 거의 매년 시카고에 돌아왔는데, 겨울이 되기 전부터 이미 날씨가 추워서 옷을 껴입고 불을 쬐어야 했다. 친구들과 생일을 축하한 뒤에는 얼른 남쪽으로 떠났다.
숫자로만 보면 시카고의 평균 기온은 서울보다 조금 낮은 정도다. 그러나 실제로는 날씨가 큰 폭으로 요동치고 특히 겨울에 매섭게 추운 날이 많다. 윈디 시티Windy City라는 별명에 걸맞게 사시사철 세찬 바람도 불고, 겨울에는 이 바람이 계속해서 눈구름을 실어온다. 때문에 시카고에서는 겨울마다 많은 노숙인이 동사한다. 스트레이가 정착 후 살던 집 옆의 고가도로 아래에도 수백 명(수 명도 아니고 수십 명도 아니다. 수백 명이다)의 노숙인들이 텐트를 치고 살았는데, 매년 겨울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르고 구치소에 들어가는 노숙인들도 있다. 쉼터는 턱없이 부족하다. 쉼터 앞에는 항상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서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스트레이는 미국 전국을 발길 닿는 대로 떠돌게 되었다. 예전에도 언급했듯 떠돌이라는 뜻의 가명 스트레이Stray는 거기서 나왔다. 실제로 떠돌던 중 만난 사람들의 절반에게 스트레이는 본명을 가르쳐주지 않고 스트레이라고 불러 달라고만 했다. 아직까지 연락이 닿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을 그 가명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