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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열차와 히치하이킹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20

by 이정미

땅덩이가 넓은 미국에서 화물열차는 아주 오래 전부터 방랑자들의 이동 수단이었다. 1860년대에 남북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군인들이 화물열차에 올라타서 귀향하기도 하고, 19세기 말 서부개척시대에 일자리를 찾던 사람들이 화물열차를 타고 서부로 떠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화물열차에 숨어 탄다.


화물열차는 사람을 태우기 위해서 만든 열차가 아니기 때문에 위험하고 불편하다. 몰래 탔다가 들키면 체포될 수도 있다. 가능한 한 안전하게 타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지식이 필요하다. 이 지식이 옛날부터 크루 체인지 가이드Crew Change Guide라는 책자에 정리되어 떠돌이들 사이에서 알음알음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스트레이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던 2009년 4월, 시카고의 무정부주의자들을 통해 크루 체인지 가이드 최신판을 손에 넣고 기뻐했다.


스트레이는 굴곡 많았던 예전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신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모르겠다고 자주 말하는데, 화물열차를 타던 일을 이야기할 때 특히 그렇다. 스트레이는 화물열차에서 떨어져서 팔다리나 목숨을 잃은 사람을 여러 명 안다. 스트레이가 떨어진 적이 없는 이유는 남들보다 특별히 조심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술에 취한 채로 열차 위에서 움직인 일도 많았다. 운동신경이 좋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운도 많이 따랐을 것이다.


화물열차가 한창 속도를 낼 때는 시속 100킬로미터에 가깝게 달리는데, 붙잡거나 기댈 만한 곳이 많지 않다. 여러 명이 화물열차를 탈 때는 대개 두세 명씩 나눠서 서로 다른 차량에 탄 후, 차량과 차량 사이를 건너뛰어 합류한다. 이 건너뛰는 순간도 위험하다. 먼지도 자주 날아오기 때문에 스카프나 손수건을 항상 목에 두르고 있다가 필요할 때 코와 입을 가려야 한다.


- 화물열차에서 화장실은 어떻게 해결했어?

- 그냥, 모든 일이 다 까다로웠어.


나는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았다.


특히 더 위험한 형태의 화물열차가 있다. 바닥이 막혀 있지 않고 15cm 너비의 철제 빔으로만 이루어진 열차다. 노숙인이 타는 일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동수단이 그것뿐일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노숙인들은 그 형태의 열차를 흔히 ‘자살 열차suicide train’라고 부른다고 한다.


스트레이도 ‘자살 열차’를 여러 번 타서 빔 위에 가만히 앉아 이동했다. 가장 오래 타 본 것은 시카고에서 캔자스까지 가는 8시간 동안이었다. 일어서는 일은 가능하지만 달리 갈 곳도 없고, 그보다도 균형을 잃으면 바로 떨어져 죽기 때문에 일어서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행인 점은 모든 화물열차는 반대 방향에서 오는 다른 열차에 길을 내 주기 위해 언젠가는 멈춰 선다는 것이다. 열차가 멈추면 열차의 끝에 있는 화물열차용 승무원실인 카부스caboose로 달려가서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다만 모든 열차에 카부스가 있지는 않다.


히치하이킹은 화물열차보다는 훨씬 안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스트레이가 몬태나 주에서 히치하이킹을 할 때,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중독자들이 스트레이의 앞에 차를 세우고는 마약이 있는지 물었다. 스트레이는 없다고 대답했고 중독자들은 차를 몰고 가 버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돌아와서 스트레이에게 타라고 했다. 스트레이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시골 한복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차에 탔다. 차는 고속도로를 시속 16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달리며 다른 차들 사이를 드리프트 했다. 스트레이는 자신이 그 날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무서운 경험이었지만 원하던 대로 시골에서 빨리 벗어나기는 했다.


거의 평생을 서울에서 보낸 내게 히치하이킹은 TV나 책에서만 본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대중교통이 발달한 대도시 주변을 조금만 벗어나면, 모르는 사람을 차에 태워주는 호의동승이 꽤 흔한 일이라고 한다. 미국은 한국과 비교할 수도 없이 큰 나라고 며칠 동안 장거리 운전을 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그동안 외롭고 심심해서 히치하이커를 태우는 운전자가 많다고 한다.


내가 놀랐던 부분은 여자 운전자들 중에도 거리낌 없이 스트레이를 태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스트레이가 몸집이 작고(키가 상당히 작은데다 노숙을 하던 당시에는 깡말랐다) 얼굴도 어려 보였기 때문에 덜 경계했을 것이고, 미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개인차도 큰 것 같다. 나와 스트레이의 친구 중에는 키가 스트레이보다 훨씬 크고 총을 여러 자루 가진 미국인 여자가 있는데, 그래도 그 친구는 자신이 낯선 남자를 차에 태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길에서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히치하이킹을 한 적이 더 많지만, 장거리 운전을 할 예정인 운전자와 인터넷에서 만나서 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스트레이가 수동 운전을 배운 계기이기도 했다. 시카고에서 플로리다까지 수동 기어 자동차를 몰고 갈 예정이던 한 여자를 크레익스리스트Craigslist라는 개인 간 거래 사이트에서 만났는데, 공짜로 태워 주는 대신 운전을 분담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당시 스트레이는 수동 운전을 할 줄 몰랐지만 금세 배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조건을 덥석 받아들였다. 친구들에게 배울 생각이었는데 결국 차 주인이 직접 가르쳐 줬고, 주차장에서 30분 만에 배웠다.


스트레이는 수동 운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이 이야기를 곧잘 했다. 그러나 항상 ‘히치하이킹을 할 때 운전을 분담하기 위해 차 주인이 수동 운전을 가르쳐 줬다. 원래 운전을 잘 했기 때문에 빨리 배웠다.’ 정도로만 간단히 이야기했다. 아무리 장거리 운전이 힘들고 지루하다고 해도 생전 처음 보는 남자, 그것도 노숙인에게 수동 운전을 직접 가르쳐 가면서까지 운전을 맡겼다니. 나는 특이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라고만 생각했다.


나중에야 스트레이에게 진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차의 주인은 헤로인에 중독되어 집을 잃고 차에서 생활하다가, 부모와 함께 지내면서 헤로인을 끊기 위해 고향인 플로리다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운전 도중에 금단증상이 올 것을 예상하고 그동안 대신 운전을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스트레이처럼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줄 사람, 헤로인 중독자와 함께 먼 길을 가는 것도 개의치 않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train_cropped.png 2010년 여름, 화물열차 위를 걷는 스트레이.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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